• 최종편집 2020-04-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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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19 종료 후 나타날 불가피한 변화와 대처 방안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종료된 후에는 지역교회와 성도들,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변화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준비해야 한다. ©pixabay(Gerd Altmann)   필자는 지역교회의 목사이며 디아스포라 이주민 선교사로서 COVID-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가 이동 중에 있는 사람들, 즉 디아스포라 이주민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깊은 염려가 있다. 수많은 여행자, 유학생, 이주근로자, 난민 등이 직접적으로 제한을 받으며 격리와 고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관광산업, 경제활동, 교육 중지 등 거의 모든 영역이 초토화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은 초기에 신천지라는 사교 집단으로 인하여 심각한 확진으로 퍼지며 사회 전체가 공황에 빠졌다. 아울러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분위기 속에서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중단되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국내의 이주민들 가운데 자국으로 출국하고, 해외에 체류하던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귀국하는 역이주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강경화 외무부 장관의 BBC와의 인터뷰는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보게 한다. 세계복음주의연맹 감독의 기도문은 교회의 역할과 방향을 제시한다. JVMI(Jewish Voice Ministries International)의 대표인 랍비 조나단 버니스의 영상 메시지는,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으로 우리가 보호받고, 위기를 극복하게 되어질 것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다.   이에 필자는 성경적, 사회학적, 선교적 관점에서, 지역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COVID-19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제안하고자 한다. 아울러 COVID-19의 위기 상황이 종료된 후, 나타나게 될 불가피한 변화에 대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적용과 준비에 대한 관심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선교의 지수를 높여야 하겠다. 첫째로, 우리는 두려움과 요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한 전염병에서 건져내실 것이다(시 91:1~3). 예수는 공생애 사역 중, 격리된 문둥병자를 찾아가셨다. 지금도 환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시며, 저들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실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리고 COVID-19 상황에서 성도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각처에서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고전 1:2)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시 139).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는 절대적이시지만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시고(행 7)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 둘째로, 기독교는 세계 역사의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배의 용골(KEEL, 선체의 중심선을 따라 배 밑을 선수에서 선미까지 꿰뚫은 부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행적은 세상에서 빛이요 소금이 되어야 하는 교회와 성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풍성했다.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는,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웃에 대한 동정과 긍휼을 베풀어왔다. 작금의 COVID-19 상황에서도,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의 바통을 이어가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분위기를 보내며, 사람들이 심리적 우울감을 호소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 기초생필품을 확보하지 못한 상대적 연약자들의 고통이 더 커지고 있다. 특히 경제계의 연쇄 파산은 코로나 그 자체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며 두려움을 준다, 그렇지만 성도는 고난의 시기에 더욱 기도하며 구제의 일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의 주위에 거주하는 이주민들 역시 COVID-19를 비껴갈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실직과 격리로 인하여 더 큰 위기감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타자로서 갖는 소외감은 강력한 심리적 압박으로 존재할 것이다. 지역교회가 이들의 방주가 되어야 하며,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이주민들에게 목회적 대응과 더 많은 관심 및 손길을 나누어야 한다.   이 상황에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회원단체에 보낸 COVID-19로 인한 철수자제 협조 요청은 매우 시의적절했다고 본다.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선교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롬 8:31~39). COVID-19에 대처하고 있는 의료인들과 공무원들의 헌신이 눈물겹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영역에서 고통받는 자들과 지역사회에 대한 위로와 구제를 감당해야 한다. 주님의 산상수훈은 이런 위기에 적용할 수 있는 선교적 지침이라 할 수 있다(마 5:2~12).   COVID-19 해결 이후에,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중 교회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예상된다. 그 이유는 대중들의 지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확산과 급감하는 경제적 상황이 도미노처럼 성도들의 경제활동 감소에도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급감은 이주민 성도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체류의 변화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IMF가 있었던 1997년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있었던 2008년에도 비슷한 위기 상황으로 이동한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많았었다. 실직한 이주민들의 발걸음이 제3국으로, 고향으로 이어졌다. COVID-19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중도 철수 및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귀국이 많아질 것이다. 거꾸로 국내 이주민들의 실직에 따른 출국이 줄을 이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오히려 이주민 선교의 긍정적인 재편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귀국 선교사 및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국내의 이주민 선교에 참여하며 언어 및 문화지수와 같은 사역의 질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출국하는 이주민들은 역파송의 기회로 이어져, 이주민 선교가 세계선교로 이어지는 효율적인 성장의 에너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교회와 이주민 선교계는 COVID-19 이후 변화에 대비하여야 한다. 경제적 여파를 대비하여 사역의 몸집을 재편해야 한다. 예배에 대한 유연한 인식과 적용이 요구되며, 일터신앙과 BAM(Business As Mission) 사역을 활성화하여야 한다. 역파송을 위하여 짜인 교육훈련과 관련 프로그램을 이주민 성도들에게 적용하여야 한다.   과거에, 변화하는 상황에서 준비되어진 단체와 이주민들에게는 떠나거나 이동함이 오히려 역파송의 호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반면에 체류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주가 불가피한 상황이 된 가운데, 준비가 안 된 단체와 이주민들은 선교의 시너지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디아스포라의 흐름은 핍박이라는 상황이 성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및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을 통해 안디옥교회가 선교의 효시가 된 것을 중요한 선교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행 11, 13).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에 현재의 COVID-19 상황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통해 하늘나라의 확장과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COVID-19의 위기를 돌파하며 주어진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여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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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 “두 줄뿐인 약력이지만 감사한 60년 인생”
      성공회대 중앙도서관 내 성공회역사자료관에서 17년간 이어온 자원봉사를 마친 송태원씨가 지난 1일 서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앞에서 성공회와 함께한 60여년의 여정을 회고하고 있다.   “약력이라곤 ‘1960년 입사, 2003년 퇴사’ 두 줄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늘 감사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교수도, 직원도, 학생도 아니지만 03학번과 함께 학교생활을 시작해 성공회대학교 중앙도서관 한 켠을 늘 지켰던 사람. 도서관 내 성공회역사자료관에서 자원봉사를 해 온 송태원(83)씨가 지난달을 끝으로 17년 동안 이어온 봉사자직을 내려놓았다. 1960년 성공회 출판부에 입사해 역사자료관 봉사까지 대한성공회의 역사와 함께한 그를 지난 1일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앞 카페에서 만났다.명함을 건네자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면서 그는 “사무실에도 집에도 안경을 2~3개씩 놓는데 용도가 다 다르다”고 했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업무를 지속해 온 덕에 오전, 오후 시력이 다 다르다는 그는 “처음 직장에서 퇴임하고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이젠 아침에 갈 곳이 없다는 게 조금은 실감이 난다”면서 “60년 가까이 성공회 덕분에 참 잘 지냈다”고 미소지었다.송씨는 2001년 개관해 자료가 일천하던 성공회역사자료관 초기에 자원봉사자로 2003년 합류했다. 성공회 출판부에서 40년 넘게 총무로 일하며 성공회신문 출간 및 각종 교회 서적 출판 업무를 도맡아 온 그는 인맥을 총동원해 자료를 채워 넣었다. 각 교회에 공문 대신 손 편지를 일일이 보내 주보, 서적 등 그간 훼손되고 버려지던 자료들을 ‘제발 모아서 보내주시라’ 읍소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자료가 있는 곳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누비기도 했다. 덕분에 현재 자료관은 고서적, 고문서, 박물, 사진 등 1만5000여건이 깔끔하게 분류된 내실 있는 데이터베이스로 성장했다.그는 “인복이 참 많다. 상근직원들이 자비로 문헌정보학 공부를 해가며 정리했고, 옆에서 도운 것뿐”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하지만 홀로 취재, 교정, 조판, 인쇄를 도맡아 만들던 성공회신문과 출판 업무 경력 덕에 자료관 일이 한층 수월했다는 말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송씨와 성공회의 인연은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장로교 신자였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모교 은사 소개로 당시 책임자였던 리처드 러트 신부와 만나 성공회 출판부 생활을 시작했다. 교리문답 해설서를 출간하며 교정을 본 덕에 2년 뒤인 1962년 세례를 받았고 평생 신앙과 생업을 함께해 왔다.봉사의 동력으로는 ‘감사하는 마음’을 첫 손에 꼽았다. 송씨는 “‘무엇을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별로 좋은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 항상 와 닿았다”며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도 중에 ‘감사합니다’뿐이라는 게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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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4-06
  • 코로나19의 시간을 견디며
      박동식 교수          I. 들어가며 「비정한 길」1 길에 진액을 다 빼앗긴 저 바싹 마른 노인 길이 노인을 밀어내는지 노인은 걷지도 못하고 길 위에서 촘촘 튄다 어찌 보면 몸을 흔들며 자신의 몸속에 든 길을 길 위에 털어놓는 것 같다 자신이 걸어온 길인, 몸의 발자국 숨을 멈추고서야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을거나 길은 유서 몸은 붓 자신에게마저 비정한 길은 짓밟히려 태어났다   시인 함민복이 그려내는 '힘겹게 길을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은 지금 코로나 19사태를 건너는 우리 모습과 조금은 아니 많이 닮아있는 듯합니다. 그것도 어느 한 지역이나 한 나라만이 아닌 전 지구적으로 말이지요. 세계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지금껏 그 어떤 것이 세계를 이렇게 휘청거리게 했을까요? 이렇게 비정한 상황을 상상이나 해 보았나요? 역사자료에서만 보던 대재난의 시간을 우리가 보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직장엘 가지 못하고, 교회공동체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서로 격리된 채 있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누가 예측했을까요? '4차 산업혁명이다,' '인공지능(AI)이다' 해도 바이러스 하나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목하 우리의 현실인 것을 목도하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어쩌면 단 한 번도 걸어가 보지 못한 '일상'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끝나는 길이 어디일지, 언제 끝날지 모른 채 걸어가야 하는 이 막연함에 일상이 흔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이러한 가운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보내는 시간이면, 이 시간도 귀한 시간일 것 같습니다.   2. 고독한 존재와 사회적 존재 1) 한없이 고독하라!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겨울임에도 떨어져 있어야 하는 각자의 감옥에서 사회적 거리를 두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합니다. 무탈하신지요? 될 수 있으면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만나더라도 악수하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대화합니다. 마치 악몽 같습니다. 아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면 차라리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악몽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 그것이 꿈인지 알고 안도감을 느낄 때가 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악몽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심해지면 가족끼리도 거리 두기를 하고 지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거리 두기를 하고 살아야 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도 고려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경우 더더욱 개별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온라인으로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기에 몸으로 직접 만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 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륙 합리론 철학자 중 한 명인 라이프니츠(1646-1716)는 실체를 '단자'(單子, monad, 모나드)라 했습니다. 단자의 특징은 "창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소통 없는 닫힌 세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소통이 필요 없을 만큼 자족적인 모습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단자같이 격리된 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시기에 '멈춤'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동차 달리는 도로에는 체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딘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체증 없는 도로를 달리고 싶다면 다른 시간대에 운전대를 잡으면 되죠. 그러나 그런 시간대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체증 있는 도로에 있다면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선 그런 상황에 갇혀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짜증을 지워 버리는 것, 좀 더 빨리 가고자 하는 운전대 잡은 손과 어깨에서 힘을 빼는 것, 조급해하지 않는 마음 등 인내하며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중요하겠죠. 수많은 우리 인생의 '멈춤' 사인 앞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인 것 같습니다. 강제적 멈춤일지라도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고독한 영성을 길러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시대 저항입니다. 올리비에 르모는 그의 책 『자발적 고독』에서, 자발적 고독을 추구하는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니요'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이라고 진단합니다.2 자발적으로 고독하며 철저히 홀로 선 존재로 살아가면서 질문하면 좋겠습니다. '존재'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일상'이 무엇인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멈추어 선 듯한 달팽이도 지나간 곳에는 왜 발자국이 남아 있는지, 삼위일체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 무엇 하고 계시는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고독하게 보내는 것, 그것도 인생길 걸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스스로 제자들과 무리와 떨어져 고독한 시간을 가지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신 후에도(마 14:23),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리하셨습니다(마 26:36). 우리 주님도 고독한 시간을 자발적으로 마련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잇대어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도원에 있으면서 잊힌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려웠지만, 모두가 자신을 잊고 산다 해도 그 시간에 "변함없이 신실하게 맞아주실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더욱더 가진다면 그 시간도 복된 시간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고독한 마음에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3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차이, 곁에 없는 것과 항상 곁에 있는 것의 차이가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 고독 가운데 서로 만나야 합니다. 2) 한없이 소통하라! 감옥에 있는 동안, 여름에는 옆에 있는 존재가 한없이 미운 존재지만, 겨울에는 한없이 필요한 존재임에 틀림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홀로 떨어져 살 수만도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소통하며 지내야 합니다. 고독한 가운데 소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나드처럼 자족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창이 없으면 창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 19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슬픈 상황에서도, 자기 집 창문을 열어 놓고 혹은 발코니에서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이 많더군요. 그것은 자기만의 고독한 자리에서 문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겠지요. 소통이 시작되면 주변의 이웃들도 자기들의 창문을 열거나 발코니에 나와 함께 그 연주에 참여합니다. 분리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도 소통의 방법을 찾는 것이지 싶습니다. 죽음이 가까이에 있어도 살기 위한 몸부림일 겁니다.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그 소통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어떠신가요? 소통하고 계신가요? 전화든 인터넷이든 창문이든 열어 세상과 소통하기를 소망합니다. 소통의 매개체를 통해 연결망을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웃과 세상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마의 배 속에 있는 아기도 탯줄로 엄마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는 홀로 살 수 없듯이 홀로만 있지 말고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도 서로 소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일체로 계시지 않습니까? 서로 잇대어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세상과 소통하는 모델을,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델에서 찾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내어주고, 서로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위해 빈자리를 만들어 주는 모습을 우리도 찾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 존재를 존중해야 합니다. 산책하다 보면 좁은 길에서 사람들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저쪽에서 두 명이 오고 이쪽에서 혼자 가면 그동안 저쪽에서 오던 둘은 자기를 제한하는 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거리 두기가 시행되자 저쪽에서 오던 이들이 옆으로 피하며 자리를 내주더군요. 코로나 19는 미국 사람도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인터넷으로 소통할 때 가짜 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것은 악 중에도 가장 큰 악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타자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자를 왜곡시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는 사람들을 헛되게 증언하는 이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잘 극복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홀로만 살 수도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홀로서기와 더불어 살기를 적절히 잘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본회퍼 목사의 말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있고, 또한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공동체 안에 있을 수 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4 홀로 선 자발적 고독자와 공동체는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한없이 고독한 시간을 보냅시다. 그러면서 한없이 소통하며 삽시다. 니체가 그랬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울 그 자체를 관찰하고자 한다면 결국 거울에 비친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물을 잡고자 하면 우리는 결국 거울 표면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식의 가장 일반적인 역사다."5 니체가 말한 인식에서 거울과 사물은 분리될 수 없듯이, 고독과 소통 또한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코로나 19를 견디면서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이제는 조금 나아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인 '교회'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3. 교회가 할 일 1) 바벨론 포로기 같은 현실을 견디며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 교회든 미국 교회든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말이죠. 이 시기가 마치 바벨론 포로기 같아 보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 때 유다에서 사로잡아간 이들을 후대의 바사 왕 고레스가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게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면서 그들은 조국을 그리워하고 성전을 그리워하고 예배를 그리워했을 겁니다. 고레스 왕의 선포로 42,360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 성전의 기초를 보고 그들은 대성통곡합니다(스 3:12).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다시금 짓는 그들의 감격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입니다. 그들의 뜨거운 눈물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바벨론 포로기 같은 시기를 보내면서, 교회에서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온라인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교회에서 예배드릴 날이 올 것입니다. 상상을 해 봅니다. 그 첫 예배가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아픔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 시대의 성도들이 그런 경험을 한 후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은혜로울까요. 모이기에 더 힘쓸 것입니다. 2) 교회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를 두고 예배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으니 논쟁이 발생한 것이지요. 거기에 따라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정말로 교회란 무엇인가요? 건물인가요, 아니면 우리 자신인가요? 주일 학교 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또 교회와 예배당은 다르다고 배웠죠. 예배당은 건물이지만 교회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구분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드린 우리의 오래된 전통 때문에 교회와 예배당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예배당을 교회와 분리 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예배당을 교회라고 말하기 때문이지요. 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3세기 카르타고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가 말한 "교회밖에 구원 없다"는데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 명제는 오늘까지 그 영향력이 있지요. 그러나 이 말은 당시 교회 즉 예배당 밖에 이단이 득실거렸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런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그 말도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하니 교회라는 것이 본질상 무엇인지 다시금 질문하게 됩니다. 교회는 우선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밖에 구원 없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교회 건물밖에 구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교회 안에 구원이 정말로 있는지'를 묻고 답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교회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예배당보다 크십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람은 하나님을 교회 건물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는 이들도 있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7년 동안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지은 건물 안에 가둘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으면 예배드리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정해진 예배 시간에 교회라는 건물 안에 있었다는 것으로 큰 위안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가는 것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으면 불안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어디서든 예배드릴 수 있는데 교회 갔다 온 것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교회 못 가면 기도도 못하고 하나님도 못 만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이 중요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화면에 보이니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매주 만나 함께 예배드리던 교회 공동체가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외로워도 힘을 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공동체 지체들이 숫자로만 존재하지 않고 함께 신앙 생활하던 교회를 떠올릴 수 있으니 교회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부차적이지만 교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헌금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는데, 교회가 헌금 없이 돌아가는지요. 목회자들 사례비는 어디서 나오나요? 선교비는 또 어디서 나오고요. 이 시기에 개교회는 헌금의 소중함도 깨닫고 교회 재정도 살펴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모두가 소모적 논쟁을 피하고 다시금 교회공동체와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 사회로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기를 소망합니다. 3) 사회적 공감에 기반한 신학 패러다임의 전환 백종원이 <골목 식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식당 개선을 도와준 강원도 팥죽 할머니가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훔치며 "세상 참 거지 같네"라는 혼자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식당도 불이 나서 힘겨운 삶을 살고 계셨던 차에 백종원을 만나 도움을 받고 식당을 다시금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진단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 백종원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할머니와 영상 통화를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이런 탄식과 이런 눈물이야말로 '공감'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적어도 세상에 대해 이런 공감의 눈물을 흘리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사태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한다면, 교회가 세상에 대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는 자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저 세상에 대해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신 이웃사랑을 다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값싼 적선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본질적으로 교회가 공공 영역에 대해 가져야 할 신학적 교회론적 이론을 먼저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19로 인해 일부 교회의 예배 강행은, 앞에서 교회의 소중함은 이미 언급했지만, 세상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맹목적 믿음이 드러내는 비상식적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한국 교회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드러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신앙은 자신은 순교자가 될지 몰라도, 그 증상을 타자에게 전염시키면 그것은 엄연히 타자를 죽이는 것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면, 예배만 잘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바이러스에서 면역시켜 준다고 믿는 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님을 알아야 하죠. 믿음이 상식적 수준만 되어도 좋을듯합니다. 질병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병을 고침에 있어서 믿음이 그들의 전문 지식 위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 마치 게임 할 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교회가 안고 있는 것 같아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교회의 바른 모습을 위해 기본 신앙의 밑바탕에 있는 신학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을 속된 것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세상을 공부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와 떨어진 그 어디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이잖아요. 우리가 함께 호흡하는 곳이잖아요. 내가 내 쉰 날숨을 이웃이 들숨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내 쉰 날숨을 우리가 들숨으로 받아들이며 살잖아요.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내 쉰 날숨만을 골라서 들숨으로 받아들이나요? 아니죠. 어떤 경계도 없잖아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경계선만 그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가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곧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런 시국에 다시금 예수님의 성육신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육으로 오지 않으셔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시는가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구원하지 못하시는가요? 왜 굳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가요? 주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면 겪어야 할 여러 가지 고난을 생각하지 못하셨을까요?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오신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겪을 것을 아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오셔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4. 일상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코로나 19로 인해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우리에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혹시나 내가 걸릴 수 있고 혹시나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걸릴 수 있기에 그러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내가 걸리면 어떻게 해서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걸리면 얼마나 미안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겠습니까. 그러한 고난의 시기에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다시금 그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언젠가 동네 공원에 온 가족이 나가 시간을 보내다가 해거름 질 무렵 집으로 함께 돌아올 때 느꼈던 것은 일상의 작은 행복이었습니다. 행복이 뭐 별건가요? 들숨조차 내줄 수 있는 가족과 함께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지 싶습니다. 큰 것 이루지 못하며 필부로 살아간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제가 sns에 올리는 일상에 관한 글의 일차 독자는 아내입니다. 내가 쓰는 글을 읽으면서 때로는 서로 함께 겪은 일상이지만 자신은 자칫 흘리며 지나가는 사사로운 사건들을 남편이 글로 남겨 그런 일상을 공유하게 해 주니 그것이 좋답니다. 그리고 농담으로 그것 때문에 데리고 산다고 하네요. 허걱. 일상 속에 흘러가는 모든 것은 어쩌면 기억되지 않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남긴 기록은 가족의 추억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누구나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일상에 의미를 부여할 때에만 그 일상이 살아있는 삶의 요소가 되는가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그 일상의 한쪽 끝을 잡으려 손을 내밉니다. 무엇이 스쳐 지나갈까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매일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선물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선물을 준 자의 뜻이 분명히 그 속에 깃들어 있기에 그 뜻을 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물도 때로는 준 자에 대한 예의를 요하지요. 매일매일 주어지는 일상이 선물이며 은혜이기에 그 일상이 글이 되게 노래 되게 해 봅시다. 그러면 이 고난이 주는 시간의 의미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겠죠.   IV. 마치며: 영원에 잇대어! 비록 시대가 불안하여, 내가 들은 대로,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당신에게는 만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말해 줄 당신의 안내자들이 있다.어떤 시대나 타당한 진리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모든 요령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당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그러나 만일에 사정이 달라진다면 물론 당신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로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라는 시의 일부입니다.6 코로나 19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 코로나 19 이전의 신학과 이후의 신학, 코로나 19 이전의 교회와 이후의 교회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코로나 19사태를 건너면서 인간의 삶 또한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에 우리는 분명 배워야 합니다. 깃발의 펄럭임을 보면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의 방향을 알기 위해, 특히나 지금의 상황을 알기 위해, 영원에 잇대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중심은 없고 펌프질만 해대는 인생이 아니라, 중심을 잡고 견고히 가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시대를 우리와 연결해서 사고해야 할 것입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이 방에서 떠서 저 방으로 지지요. 대상 세계를 먼 곳에만 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필요도 있을 겁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에 대한 신정론적 질문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제기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몇몇 목사들이 그 원인을 어떤 특정한 사건과 연관 지어 설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인-결과 답변은 설득력이 전혀 없지요. 그리고 전 세계가 고난을 받고 있으니 무엇이 그 원인이라 해야 할까요? 다만 우리 모두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신정론을 물을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묻고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아삽의 시처럼,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시 77:8) 묻기도 합니다. 주를 믿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약속하신 약속을 분명히 성취하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심했던 이들이 어디 우리뿐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자체가 그 고난에 대한 다른 답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다시금 하나님께 조용히 나아가 그가 하신 말씀과 그가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묵상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삽처럼 우리도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시 77:12)이기를 소망합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죠. 고난 가운데 묵묵히 영원에 잇대어 말씀에 침잠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끔 외줄 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신기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 자체도 어쩌면 외줄의 폭 만큼만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외줄의 폭이면 인생길을 걷기에 족할 텐데 너무나 넓은 길을 차지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넓은 길을 걷다 보면 오히려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던가요? 그 길 자체가 자기 것인 양 걷게 되지 않는가요? 반면에 외줄 위의 인생은 신중합니다. 단 한 순간도 허튼 곳에 생각을 두지 않게 됩니다. 함부로 입을 열지 않게 됩니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목표를 향해 시선을 모으고 한 발짝씩 한 발짝씩 걸어가게 됩니다. 허우적거리는 두 팔을 보세요. 누가 저 공간을 허공이라 했던가요? 두 팔 뻗어 하늘을 잡으며 균형을 잡지 않는가요? 잡을 것이 저 하늘에 있는 것이지요. 오늘도 주어진 인생길, 보다 신중히 온몸과 정성을 다해 걸어가 봅시다. 그렇게 살아가 봅시다. 그러면 외줄 위에서 각(覺)하는 때가 오겠지요. 이번 코로나 19를 건너며 한없이 고독하게, 한없이 소통하며, 영원에 잇대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박동식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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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 기독교와 빨간 머리 앤
                        최휘운 독서논술 교사   <빨간 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이 책의 독자를 10대 소녀들로 예상했다. 그러나 남자 대학생, 할머니, 할아버지,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 등 전 세계의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수백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결국 앤 시리즈는 10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 앤이 기독교와 가깝다는 걸 모르는 이가 많다. 드라마나 전시회 등을 통해 '재해석'된 앤은 오히려 기독교와 정반대로 달리고 있고, 참된 앤은 점점 잊혀지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흔적들을 꺼내 보았다.   책 속으로 들어가기 전, 저자의 바탕부터 살펴보자.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의 선조들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캐나다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겼고, 성실했으며, 가족을 중시했고, 신념, 검소, 포부라는 전통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몽고메리는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을 쓸 때 미혼이었으나, 앤을 출판(1908)하고 3년 뒤 이완 맥도널드 목사와 결혼했다.   <빨간 머리 앤>은 나이 든 오누이가 남자 아이를 하나 입양하려다가 실수로 여자 아이를 입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앤은 우여곡절 끝에 커스버트 남매와 살게 되고, 처음으로 기도(祈禱)란 걸 배우게 된다. 마릴라는 기도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앤의 말에 놀라며 하나님은 아느냐고 묻는다. 앤의 대답은 이랬다. "하나님은 영혼이요,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시며, 그 안에 지혜와 힘과 거룩함과 정의와 선함과 진리가 있어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내용이다(제4문 답). 앤은 이를 어디서 배웠을까? "고아원의 주일학교에서요. 교리문답서를 모두 외우게 했거든요. 저는 그걸 좋아했어요. 거기엔 멋진 단어들이 많거든요.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시며', 참 장엄하지 않아요? 마치 커다란 오르간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꼭 시(詩)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처럼 들리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주기도문(主祈禱文)을 배운 후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게 좋아요. 주기도문은 아름다워요. ··· 이건 시는 아니지만 시와 같은 감동을 줘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이건 한 줄의 음악 같아요. 아, 이걸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서 참 기뻐요." 이런 앤이지만 모든 기도를 기뻐하는 건 아니다. 벨 장로님의 기도에는 비판적이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얘기하고 있었고, 기도하기를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제가 보기에 장로님은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앤이 닮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 "종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정말 몰랐어요. 전 항상 종교는 약간 우울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앨런 부인의 종교는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앨런 부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요. 전 벨 장로님 같은 기독교인은 되고 싶지 않아요." 마릴라는 엄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벨 장로님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는 건 아주 버릇없는 짓이야. 벨 장로님은 정말 좋은 분이다." 앤은 수긍하지만 예리하게 덧붙인다. "물론 좋은 분이죠. 하지만 벨 장로님은 신앙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얻는 것 같지는 않아요." 목회자는 이렇게 본다. (조건을 주시하라) "제가 남자였다면 목사가 되려고 했을 거예요. 신학적으로 올바르다면 목사들은 사람들에게 좋을 영향을 줄 거예요." 성도(聖徒)의 교제엔 이런 반응이다. "목사님 부인(夫人)과 친구가 되면 여분의 양심을 더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스스로에 대한 고민도 한다. "전 정말 착해지고 싶어요. 마릴라 아주머니나 앨런 부인이나 스테이시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들고, 이분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일만 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와 있을 땐, 전 늘 아주 못된 아이가 되는 것 같고, 아주머니가 못 하게 하시는 일만 하고 싶어져요. 참을 수 없이 그런 유혹을 느껴요. 제가 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너무 못되고 신앙으로 거듭나지 못해서 그런가요?" 앤은 쾌활한 소녀지만, 반성(反省)의 소녀이기도 하다. "자수정 브로치 사건을 계기로 제 물건이 아닌 걸 함부로 만지는 버릇을 고쳤고요. 유령의 숲은 상상에 빠져서 헤매는 버릇을 고쳐 주었어요. 진통제 레이어 케이크 사건은 요리할 때에 부주의한 제 습관을 없애 주었잖아요. 또 머리에 염색을 해 본 뒤로는 허영심도 고치고요. ··· 오늘 실수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걸 좋아하는 버릇을 고쳐 줄 거예요." 이제 <빨간 머리 앤>의 마지막 문장을 밝힐 차례다. 사실 이 문장은 작품을 끝까지 읽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적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고민했으나, 기독교의 흔적을 내놓기로 했으니 마저 쓴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부디 작품 전체를 읽어 이 구절을 다시 만나게 되길 소망한다. 진심으로. 간절히. "하나님은 천국에 계시고, 세상은 공평하도다." 최휘운(독서·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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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 평화나무, 설교자를 고발하다
    최덕성 박사   유튜브 시사평론 방송을 하는 평화나무(이사장 김용민)는 설교 중에 정치발언을 하거나 특정 정당을 지지 반대한 12명의 대형교회 목사들을 사법에 고소할 것이라고 한다(평화나무는 2일 10명의 목회자를 추가로 고발할 계획임을 밝히기도 했다-편집자 주). 설교 중에 공직선거법에 저촉되는 발언을 한 개신교 목회자들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고 또 경찰에 고발할 것이란다. 4월 15일까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선거법 위반 사례가 드러나면 법적 조치를 할 예정이다. 주일설교와 자료물 등에서 특정 정당과 정치인, 특히 주사파 정치인들에 대한 낙선을 유도한 설교자들을 고발한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공명선거의 모범이 되는 원년을 만들겠다고 한다.     평화나무는 또 “예배 설교 중 선거법 위반 사례에 대한 신고포상 캠페인을 벌인다”고 밝혔다. “총선 선거운동 개시일인 4월 2일부터 15일 투표 종료 시점까지 발생하는 불법선거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신고를 받는다. 예배 중 사회, 기도, 설교, 광고 등 순서에서 특정 정당과 후보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 발언을 한 목회자가 신고 대상자이다. 누구나 신고할 수 있으며 신고자의 신상은 철저히 보호한다”고 한다. 또 “신고된 사안 중 최종 유죄 확정판결을 받을 경우 포상금 20만원을 추가 지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유관기관으로부터 법 위반 유권해석을 받은 시민 신고 건에 대해서만 추가 포상금을 지급한다고 했다.   평화나무가 거론하는 설교자는 12명이다. 김종준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 이성화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반기독교세력대응위원장), 이은재 목사(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변인, 전 순국결사대총사령관), 심하보 목사(은평제일교회), 정동수 목사(사랑침례교회), 손현보 목사(세계로교회), 허남길 목사(양산 온누리교회), 박경배 목사(송촌장로교회), 김성일 목사(광명 한소망교회), 김진홍 목사(동두천두레교회), 고병찬 목사(운정참존교회), 이한의 목사(부산은항교회) 등이다. 이들의 설교가 현행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평화나무의 고발대상 후보군에 포함되어 있는 손현보 목사는 부산지역에서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주목할만한 설교자이다. 매 주일 예배를 유튜브로 동시방송을 하고 있다. 손현보 목사는 2020년 2월 23일 주일예배에서 ‘좌파와 우파 그리고 기독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시편의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삼았다. 설교 중에 청와대와 여당에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추종하는 주사파’가 잠입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좌파 주류는 ‘주체사상파’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중도 우파’이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 주사파 인사들을 끌어들였다, 기독교인은 좌파가 될 수 없다고 설교했다.   손현보 목사는 전·현직 청와대 비서관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상당수가 주사파이고, 학생운동 출신이고,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찬성, 2010년 천안함 대북 규탄 결의안 반대, 2014년 미국 북한인권법 제정 항의 서한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라고 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신동호 연설비서관,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윤건영 전 국정기획상황실장, 조국 전 법무부장관 등 실명까지 직접 거론했고 이들이 주사파라고 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토지공개념’, ‘동일노동 동일임금’, ‘종교 재편’ 발언을 거론하며 “투표를 통해서도 정말 주체사상파[에 속하는] 이런 사람들을 국회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좌파의 기원을 프랑스혁명의 자코뱅당에서, 우파의 기원을 미국 독립혁명에서 찾는다. 자코뱅당이 반종교(반기독교), 무신론, 이성숭배, 사유재산제도 부정, 시장경제 거부, 이혼·동성애 장려 등의 정책을 펼쳤다고 했다. 이 좌파 사상을 출발점으로 삼아 공산주의,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등이 나왔다고 했다. 손현보에 따르면, 우파는 개인의 자유, 양심의 자유, 교회의 자유, 철저하게 자유를 가르친다. 프랑스혁명에서 기원한 자유는 전통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지금까지 내려왔던 모든 제도, 법, 종교, 전통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수립된 사회제도로부터의 자유, 종교로부터의 자유, 규범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들은 성경적인 모든 것들을 다 거부했다. 좌파는 반기독교에서 나왔다.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부모, 교회, 목사, 어떤 권위 이런 걸 인정하지 않는다. 좌파는 신을 배격하고,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우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한다. 전자는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나눠주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후자는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며 노예제 폐지, 신분제 폐지에 앞장섰다.   또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추종하는 주사파’가 청와대와 여당에 침투했다고 했다. 그리고 “주사파들은 이승만을 가장 싫어한다.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는 북한처럼 통일이 되었을 것”이라며 “이승만이 나중에 독재도 했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이 정말 역사를 잘못 알고 있다. 3.15 부정선거의 책임은 전적으로 이기붕에게 있다. 이승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승만은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진 사퇴했다. 독재자가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는가? 이승만은 딱 내려놓고 하와이로 그냥 가버렸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설교 중에 ‘주사파 전대협·운동권이 장악한 청와대’라는 제목의 사진영상 화면을 신도들에게 보여주며 “한국에서 이렇게 김일성이의 이념을 추종하는 주사파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사진을 한 번 보겠다. 청와대 안에 있는 사람, 이번 문재인 정부 들어 청와대 안에서 주사파로 있는 사람, 주사파와 전대협 이런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구약의 엘리야, 나단 선지자 등을 거론하며 “선지자가 정치나 왕한테 관여를 안 했나. 모든 선지자들은 불의한 정권에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좌파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바, 기독교인은 이런 좌파가 될 수 없다. 좌파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는 아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우파지향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토지공개념’, ‘동일노동 동일임금’, ‘종교 재편’ 발언을 거론하며 이것들은 전체주의국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라고 했다. 토지공개념은 공산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교인들 중에 좌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웅크리고 있다가 “교회가 끝나겠구나”하는 오늘에 이르러 목사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공산주의 국가 중에 잘 사는 나라가 없다고 하면서 쿠바를 예로 들었다. 동일임금을 실현한 쿠바는 의사나 청소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20달러 밖에 못 받는다고 했다. 이어 성경의 달란트 비유를 들면서, 열 달란트 받은 자도 있고, 더 남긴 사람은 더 가져야 되는 것이다. 심지어 없는 것을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주라고 했다며, 우파는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 ‘자기가 노력한 것만 가져가야 된다’ 이것이 평등이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평등이지, 공부하지 않는 자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자가 똑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우리나라가 현재 역사적인 기로에 서 있다고 했다. 5년, 10년 만에 ‘나라가 완전히 망할 수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을 하면 “섬뜩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기독교가 진정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고 했다. 이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면 안 된다고 했다. “투표를 통해 여러분들이 정말 주체사상파 이런 사람들을 국회에 보내서는 안 된다. 우리 기독교를 죽이려고 한다”고 했다. 자신은 정치적으로 어느 정당에 가입해 있지 않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설교를 마무리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이 악인들은 심판하고 대한민국을 통해 온 세계가 복음화 되도록 한국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해 달라고 간구했다.   교회는 교회법을 따른다. 설교는 교회법 구도에서 평가할 사안이다. 설교 강단을 정치에 오용함은 잘못이다. 그러나 시대를 분별할 목적으로 정치적 변화와 사상의 흐름을 알려주고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철학, 역사를 소개하는 것은 교회의 고유한 권세에 속한다. 설교자는 교회 안의 기독인들을 향해서만 외치는 자가 아니다. 자기 시대를 향해 외치는 메신저이다. 시대를 본받지 말라고 외치는 자(롬 12:2)이다. 설교는 국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다. 교회의 강단은 설교자가 자신이 믿고 신앙하는 바를 설교하는 곳이다. 설교 강단은 특정 정치 유형이 기독교 신앙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며 그 기원을 가르치고 기독인들에게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지식과 기준을 제시하는 곳이다.   삶의 정황과 사회와 정치 현실과 동떨어진 설교는 호소력을 지닐 수 없다. 선거철의 설교자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성경적 가치와 기독교 세계관을 변호하고 지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기독인이 명심해야 할 세상 이념의 역사와 배경을 알려 주고, 무엇이 위험하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칠 선지자적 혀를 가진 자이다. 손현보 목사는 탁월한 설교자이다. 호소력을 지닌 매력적인 설교를 했다. 시종 설교 원고를 보지 않고 단호하고 간명하게 세상 분별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했다. 신도들이 호흡하며 막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현 시대 정치의 사상적 흐름을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소개했다. 손현보의 설교는 성경본문 강해가 아니었지만 탁월했다. 시의성 있는 설교였다.   손현보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들을 국회로 보내지 말라는 요지로 설교했다. 교회법과 선거법의 대 충돌이 예견된다. 설교자를 사법에 고발하는 행위는 교회의 권세,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폄하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설교 방해에 해당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김용민과 궤를 같이 하는 소위 기독교 진보 진영의 교회들를 목회하는 다수의 설교자들은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가? 오랫 동안 해방신학, 민중운동, 혁명, 하나님의 선교 등의 프레임에 따르는 설교, 강의, 행동을 해 왔다.   <위키피아> 정보에 따르면, 평화나무 이사장 김용민(1974년생)은 장로교회의 목사의 아들이다. 강남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시사평론가와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 때 <뉴스앤조이> 편집장을 역임했고, 팟캐스트 진행을 하기도 했다. 마르틴 루터처럼 교회개혁에 앞장서고 싶어 한다고 한다. 설교자들을 고발하려는 까닭은 설교의 자리에 세속 정치와 선거법에 위반되는 메시지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용민은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발언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보지맛 오징어 보징어”, “피임약을 최음제로 바꿔서 피임약이라고 팔고는 안에는 최음제에요” 등의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 정치적 ‘좌파’ 편향성을 보인다. 김용민은 도올 김용옥과 마찬가지로 한신대학교와 관련된 진보계 기독교의 ‘변종 신학’에 익숙한 우리 시대의 기인으로 보인다. 설교자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거나 성경적 가치를 저해하는 정치운동과 정당활동을 경계하도록 설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있다. 교회법과 국가법 사이에 서 있다. ‘전도폭발’이라는 전도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복음전도에 이바지한 제임스 케네디 목사는 여러 차례 주일예배애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설교를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공산주의 비판하는 설교자가 적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설교자는 교회법과 신학 프레임만이 아니라 국가의 공직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불가피할 경우도 없지 않다. 설교자는 두 법의 대척점에 있다. 뱀같이 지혜롭게 해야 할 의무와 순교정신으로 대응해야 할 처지이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정치 마르크시즘과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 마르크시즘에 시달리고 있다.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를 보아야 하는 위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다수 기독인들은 주사파 정치인들, 혁명적 사회주의자, 민주노총, 전교조 등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좌파 정치권력 안에 기생하며 대한민국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쳐야 할 목사가 교인들에게 세상 풍조와 사상의 흐름과 위험성을 주지시키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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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3
  • 예배 없는 목회 사역 이야기
      ▲조건회 목사 코로나19’ 목회자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예배·집회·심방이 중단된 지금, 목회자들로부터 현재 신앙생활 이야기를 들어봤다.   기존 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면서 예배를 사모하는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 더욱 중보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교역자들과 매주 1권씩 ‘기도’에 관한 책을 읽는 시간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요즘에는 ‘지키는 기도’라는 책을 읽는데 참 좋더라고요.내 양 떼와도 같은 성도들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교회 내 구역장들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성도님들의 기도제목을 모았습니다. 이를 두고 날마다 교역자들과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수요오전예배에는 예배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시리즈 특강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주봉 목사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까지는 외부사역도 많고, 늘 바빴습니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사역을 할 수 없게 되니 개인적으로 휴식도 얻으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히 교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교회에 매일 온라인 예배로 오전 10시에 기도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30분간 주제 설교 후,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하죠. 300명 이상 매일 참석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님이 기도회 시간이 좋다고 피드백을 전하더라고요. 그래서 코로나19가 지나가더라도 오전, 저녁 기도회는 계속 진행할 예정입니다   ▲장헌일 목사   70세 이상 어르신들이 어떻게 이 시기를 잘 보내실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유튜브로 설교를 진행하더라도 이용방법을 몰라서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설교 후에 문자로 설교를 정리해서 보내드리고 전화 심방을 진행하고 있는데, “빨리 교회에 가고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노인 대학은 중단됐고, 매일 식사를 제공하던 쪽방촌 독거노인 사역은 요일을 지정해 일주일분 대체식사를 준비해드리고 거동이 어려운 분들은 직접 찾아가 전달하며 한 분씩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 작은 위로와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동영 목사   이 시기를 통해 그동안의 사역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 목회를 하는 목회자로서 청년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제법 익숙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사역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부족했던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의 특성을 파악하며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한데 목회자로서 그런 노력들이 부족했던 게 보였습니다.코로나를 기점으로 한국교회 사역의 틀이 좀 바뀌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됩니다. 청년들과 소통하는 다양한 루트를 모색하고 있고, 대면하지 못하는 현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청년들의 진중한 삶의 고백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많이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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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4-03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코로나19 종료 후 나타날 불가피한 변화와 대처 방안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종료된 후에는 지역교회와 성도들,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변화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준비해야 한다. ©pixabay(Gerd Altmann)   필자는 지역교회의 목사이며 디아스포라 이주민 선교사로서 COVID-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가 이동 중에 있는 사람들, 즉 디아스포라 이주민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깊은 염려가 있다. 수많은 여행자, 유학생, 이주근로자, 난민 등이 직접적으로 제한을 받으며 격리와 고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관광산업, 경제활동, 교육 중지 등 거의 모든 영역이 초토화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은 초기에 신천지라는 사교 집단으로 인하여 심각한 확진으로 퍼지며 사회 전체가 공황에 빠졌다. 아울러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분위기 속에서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중단되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국내의 이주민들 가운데 자국으로 출국하고, 해외에 체류하던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귀국하는 역이주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강경화 외무부 장관의 BBC와의 인터뷰는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보게 한다. 세계복음주의연맹 감독의 기도문은 교회의 역할과 방향을 제시한다. JVMI(Jewish Voice Ministries International)의 대표인 랍비 조나단 버니스의 영상 메시지는,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으로 우리가 보호받고, 위기를 극복하게 되어질 것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다.   이에 필자는 성경적, 사회학적, 선교적 관점에서, 지역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COVID-19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제안하고자 한다. 아울러 COVID-19의 위기 상황이 종료된 후, 나타나게 될 불가피한 변화에 대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적용과 준비에 대한 관심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선교의 지수를 높여야 하겠다. 첫째로, 우리는 두려움과 요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한 전염병에서 건져내실 것이다(시 91:1~3). 예수는 공생애 사역 중, 격리된 문둥병자를 찾아가셨다. 지금도 환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시며, 저들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실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리고 COVID-19 상황에서 성도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각처에서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고전 1:2)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시 139).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는 절대적이시지만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시고(행 7)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 둘째로, 기독교는 세계 역사의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배의 용골(KEEL, 선체의 중심선을 따라 배 밑을 선수에서 선미까지 꿰뚫은 부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행적은 세상에서 빛이요 소금이 되어야 하는 교회와 성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풍성했다.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는,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웃에 대한 동정과 긍휼을 베풀어왔다. 작금의 COVID-19 상황에서도,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의 바통을 이어가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분위기를 보내며, 사람들이 심리적 우울감을 호소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 기초생필품을 확보하지 못한 상대적 연약자들의 고통이 더 커지고 있다. 특히 경제계의 연쇄 파산은 코로나 그 자체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며 두려움을 준다, 그렇지만 성도는 고난의 시기에 더욱 기도하며 구제의 일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의 주위에 거주하는 이주민들 역시 COVID-19를 비껴갈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실직과 격리로 인하여 더 큰 위기감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타자로서 갖는 소외감은 강력한 심리적 압박으로 존재할 것이다. 지역교회가 이들의 방주가 되어야 하며,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이주민들에게 목회적 대응과 더 많은 관심 및 손길을 나누어야 한다.   이 상황에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회원단체에 보낸 COVID-19로 인한 철수자제 협조 요청은 매우 시의적절했다고 본다.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선교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롬 8:31~39). COVID-19에 대처하고 있는 의료인들과 공무원들의 헌신이 눈물겹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영역에서 고통받는 자들과 지역사회에 대한 위로와 구제를 감당해야 한다. 주님의 산상수훈은 이런 위기에 적용할 수 있는 선교적 지침이라 할 수 있다(마 5:2~12).   COVID-19 해결 이후에,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중 교회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예상된다. 그 이유는 대중들의 지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확산과 급감하는 경제적 상황이 도미노처럼 성도들의 경제활동 감소에도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급감은 이주민 성도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체류의 변화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IMF가 있었던 1997년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있었던 2008년에도 비슷한 위기 상황으로 이동한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이 많았었다. 실직한 이주민들의 발걸음이 제3국으로, 고향으로 이어졌다. COVID-19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중도 철수 및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귀국이 많아질 것이다. 거꾸로 국내 이주민들의 실직에 따른 출국이 줄을 이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오히려 이주민 선교의 긍정적인 재편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귀국 선교사 및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국내의 이주민 선교에 참여하며 언어 및 문화지수와 같은 사역의 질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출국하는 이주민들은 역파송의 기회로 이어져, 이주민 선교가 세계선교로 이어지는 효율적인 성장의 에너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교회와 이주민 선교계는 COVID-19 이후 변화에 대비하여야 한다. 경제적 여파를 대비하여 사역의 몸집을 재편해야 한다. 예배에 대한 유연한 인식과 적용이 요구되며, 일터신앙과 BAM(Business As Mission) 사역을 활성화하여야 한다. 역파송을 위하여 짜인 교육훈련과 관련 프로그램을 이주민 성도들에게 적용하여야 한다.   과거에, 변화하는 상황에서 준비되어진 단체와 이주민들에게는 떠나거나 이동함이 오히려 역파송의 호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반면에 체류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주가 불가피한 상황이 된 가운데, 준비가 안 된 단체와 이주민들은 선교의 시너지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디아스포라의 흐름은 핍박이라는 상황이 성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및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디아스포라 이주민들을 통해 안디옥교회가 선교의 효시가 된 것을 중요한 선교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행 11, 13).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에 현재의 COVID-19 상황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통해 하늘나라의 확장과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COVID-19의 위기를 돌파하며 주어진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여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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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 “두 줄뿐인 약력이지만 감사한 60년 인생”
      성공회대 중앙도서관 내 성공회역사자료관에서 17년간 이어온 자원봉사를 마친 송태원씨가 지난 1일 서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앞에서 성공회와 함께한 60여년의 여정을 회고하고 있다.   “약력이라곤 ‘1960년 입사, 2003년 퇴사’ 두 줄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늘 감사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교수도, 직원도, 학생도 아니지만 03학번과 함께 학교생활을 시작해 성공회대학교 중앙도서관 한 켠을 늘 지켰던 사람. 도서관 내 성공회역사자료관에서 자원봉사를 해 온 송태원(83)씨가 지난달을 끝으로 17년 동안 이어온 봉사자직을 내려놓았다. 1960년 성공회 출판부에 입사해 역사자료관 봉사까지 대한성공회의 역사와 함께한 그를 지난 1일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앞 카페에서 만났다.명함을 건네자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면서 그는 “사무실에도 집에도 안경을 2~3개씩 놓는데 용도가 다 다르다”고 했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업무를 지속해 온 덕에 오전, 오후 시력이 다 다르다는 그는 “처음 직장에서 퇴임하고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이젠 아침에 갈 곳이 없다는 게 조금은 실감이 난다”면서 “60년 가까이 성공회 덕분에 참 잘 지냈다”고 미소지었다.송씨는 2001년 개관해 자료가 일천하던 성공회역사자료관 초기에 자원봉사자로 2003년 합류했다. 성공회 출판부에서 40년 넘게 총무로 일하며 성공회신문 출간 및 각종 교회 서적 출판 업무를 도맡아 온 그는 인맥을 총동원해 자료를 채워 넣었다. 각 교회에 공문 대신 손 편지를 일일이 보내 주보, 서적 등 그간 훼손되고 버려지던 자료들을 ‘제발 모아서 보내주시라’ 읍소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자료가 있는 곳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누비기도 했다. 덕분에 현재 자료관은 고서적, 고문서, 박물, 사진 등 1만5000여건이 깔끔하게 분류된 내실 있는 데이터베이스로 성장했다.그는 “인복이 참 많다. 상근직원들이 자비로 문헌정보학 공부를 해가며 정리했고, 옆에서 도운 것뿐”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하지만 홀로 취재, 교정, 조판, 인쇄를 도맡아 만들던 성공회신문과 출판 업무 경력 덕에 자료관 일이 한층 수월했다는 말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송씨와 성공회의 인연은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장로교 신자였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모교 은사 소개로 당시 책임자였던 리처드 러트 신부와 만나 성공회 출판부 생활을 시작했다. 교리문답 해설서를 출간하며 교정을 본 덕에 2년 뒤인 1962년 세례를 받았고 평생 신앙과 생업을 함께해 왔다.봉사의 동력으로는 ‘감사하는 마음’을 첫 손에 꼽았다. 송씨는 “‘무엇을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별로 좋은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 항상 와 닿았다”며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도 중에 ‘감사합니다’뿐이라는 게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04-06
  • 코로나19의 시간을 견디며
      박동식 교수          I. 들어가며 「비정한 길」1 길에 진액을 다 빼앗긴 저 바싹 마른 노인 길이 노인을 밀어내는지 노인은 걷지도 못하고 길 위에서 촘촘 튄다 어찌 보면 몸을 흔들며 자신의 몸속에 든 길을 길 위에 털어놓는 것 같다 자신이 걸어온 길인, 몸의 발자국 숨을 멈추고서야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을거나 길은 유서 몸은 붓 자신에게마저 비정한 길은 짓밟히려 태어났다   시인 함민복이 그려내는 '힘겹게 길을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은 지금 코로나 19사태를 건너는 우리 모습과 조금은 아니 많이 닮아있는 듯합니다. 그것도 어느 한 지역이나 한 나라만이 아닌 전 지구적으로 말이지요. 세계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지금껏 그 어떤 것이 세계를 이렇게 휘청거리게 했을까요? 이렇게 비정한 상황을 상상이나 해 보았나요? 역사자료에서만 보던 대재난의 시간을 우리가 보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직장엘 가지 못하고, 교회공동체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서로 격리된 채 있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누가 예측했을까요? '4차 산업혁명이다,' '인공지능(AI)이다' 해도 바이러스 하나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목하 우리의 현실인 것을 목도하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어쩌면 단 한 번도 걸어가 보지 못한 '일상'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끝나는 길이 어디일지, 언제 끝날지 모른 채 걸어가야 하는 이 막연함에 일상이 흔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이러한 가운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보내는 시간이면, 이 시간도 귀한 시간일 것 같습니다.   2. 고독한 존재와 사회적 존재 1) 한없이 고독하라!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겨울임에도 떨어져 있어야 하는 각자의 감옥에서 사회적 거리를 두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합니다. 무탈하신지요? 될 수 있으면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만나더라도 악수하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대화합니다. 마치 악몽 같습니다. 아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면 차라리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악몽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 그것이 꿈인지 알고 안도감을 느낄 때가 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악몽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심해지면 가족끼리도 거리 두기를 하고 지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거리 두기를 하고 살아야 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도 고려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경우 더더욱 개별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온라인으로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기에 몸으로 직접 만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 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륙 합리론 철학자 중 한 명인 라이프니츠(1646-1716)는 실체를 '단자'(單子, monad, 모나드)라 했습니다. 단자의 특징은 "창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소통 없는 닫힌 세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소통이 필요 없을 만큼 자족적인 모습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단자같이 격리된 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시기에 '멈춤'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동차 달리는 도로에는 체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딘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체증 없는 도로를 달리고 싶다면 다른 시간대에 운전대를 잡으면 되죠. 그러나 그런 시간대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체증 있는 도로에 있다면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선 그런 상황에 갇혀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짜증을 지워 버리는 것, 좀 더 빨리 가고자 하는 운전대 잡은 손과 어깨에서 힘을 빼는 것, 조급해하지 않는 마음 등 인내하며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중요하겠죠. 수많은 우리 인생의 '멈춤' 사인 앞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인 것 같습니다. 강제적 멈춤일지라도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고독한 영성을 길러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시대 저항입니다. 올리비에 르모는 그의 책 『자발적 고독』에서, 자발적 고독을 추구하는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니요'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이라고 진단합니다.2 자발적으로 고독하며 철저히 홀로 선 존재로 살아가면서 질문하면 좋겠습니다. '존재'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일상'이 무엇인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멈추어 선 듯한 달팽이도 지나간 곳에는 왜 발자국이 남아 있는지, 삼위일체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 무엇 하고 계시는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고독하게 보내는 것, 그것도 인생길 걸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스스로 제자들과 무리와 떨어져 고독한 시간을 가지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신 후에도(마 14:23),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리하셨습니다(마 26:36). 우리 주님도 고독한 시간을 자발적으로 마련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잇대어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도원에 있으면서 잊힌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려웠지만, 모두가 자신을 잊고 산다 해도 그 시간에 "변함없이 신실하게 맞아주실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더욱더 가진다면 그 시간도 복된 시간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고독한 마음에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3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차이, 곁에 없는 것과 항상 곁에 있는 것의 차이가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 고독 가운데 서로 만나야 합니다. 2) 한없이 소통하라! 감옥에 있는 동안, 여름에는 옆에 있는 존재가 한없이 미운 존재지만, 겨울에는 한없이 필요한 존재임에 틀림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홀로 떨어져 살 수만도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소통하며 지내야 합니다. 고독한 가운데 소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나드처럼 자족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창이 없으면 창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 19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슬픈 상황에서도, 자기 집 창문을 열어 놓고 혹은 발코니에서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이 많더군요. 그것은 자기만의 고독한 자리에서 문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겠지요. 소통이 시작되면 주변의 이웃들도 자기들의 창문을 열거나 발코니에 나와 함께 그 연주에 참여합니다. 분리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도 소통의 방법을 찾는 것이지 싶습니다. 죽음이 가까이에 있어도 살기 위한 몸부림일 겁니다.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그 소통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어떠신가요? 소통하고 계신가요? 전화든 인터넷이든 창문이든 열어 세상과 소통하기를 소망합니다. 소통의 매개체를 통해 연결망을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웃과 세상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마의 배 속에 있는 아기도 탯줄로 엄마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는 홀로 살 수 없듯이 홀로만 있지 말고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도 서로 소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일체로 계시지 않습니까? 서로 잇대어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세상과 소통하는 모델을,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델에서 찾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내어주고, 서로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위해 빈자리를 만들어 주는 모습을 우리도 찾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 존재를 존중해야 합니다. 산책하다 보면 좁은 길에서 사람들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저쪽에서 두 명이 오고 이쪽에서 혼자 가면 그동안 저쪽에서 오던 둘은 자기를 제한하는 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거리 두기가 시행되자 저쪽에서 오던 이들이 옆으로 피하며 자리를 내주더군요. 코로나 19는 미국 사람도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인터넷으로 소통할 때 가짜 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것은 악 중에도 가장 큰 악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타자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자를 왜곡시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는 사람들을 헛되게 증언하는 이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잘 극복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홀로만 살 수도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홀로서기와 더불어 살기를 적절히 잘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본회퍼 목사의 말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있고, 또한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공동체 안에 있을 수 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4 홀로 선 자발적 고독자와 공동체는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한없이 고독한 시간을 보냅시다. 그러면서 한없이 소통하며 삽시다. 니체가 그랬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울 그 자체를 관찰하고자 한다면 결국 거울에 비친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물을 잡고자 하면 우리는 결국 거울 표면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식의 가장 일반적인 역사다."5 니체가 말한 인식에서 거울과 사물은 분리될 수 없듯이, 고독과 소통 또한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코로나 19를 견디면서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이제는 조금 나아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인 '교회'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3. 교회가 할 일 1) 바벨론 포로기 같은 현실을 견디며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 교회든 미국 교회든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말이죠. 이 시기가 마치 바벨론 포로기 같아 보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 때 유다에서 사로잡아간 이들을 후대의 바사 왕 고레스가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게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면서 그들은 조국을 그리워하고 성전을 그리워하고 예배를 그리워했을 겁니다. 고레스 왕의 선포로 42,360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 성전의 기초를 보고 그들은 대성통곡합니다(스 3:12).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다시금 짓는 그들의 감격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입니다. 그들의 뜨거운 눈물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바벨론 포로기 같은 시기를 보내면서, 교회에서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온라인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교회에서 예배드릴 날이 올 것입니다. 상상을 해 봅니다. 그 첫 예배가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아픔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 시대의 성도들이 그런 경험을 한 후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은혜로울까요. 모이기에 더 힘쓸 것입니다. 2) 교회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를 두고 예배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으니 논쟁이 발생한 것이지요. 거기에 따라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정말로 교회란 무엇인가요? 건물인가요, 아니면 우리 자신인가요? 주일 학교 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또 교회와 예배당은 다르다고 배웠죠. 예배당은 건물이지만 교회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구분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드린 우리의 오래된 전통 때문에 교회와 예배당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예배당을 교회와 분리 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예배당을 교회라고 말하기 때문이지요. 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3세기 카르타고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가 말한 "교회밖에 구원 없다"는데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 명제는 오늘까지 그 영향력이 있지요. 그러나 이 말은 당시 교회 즉 예배당 밖에 이단이 득실거렸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런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그 말도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하니 교회라는 것이 본질상 무엇인지 다시금 질문하게 됩니다. 교회는 우선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밖에 구원 없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교회 건물밖에 구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교회 안에 구원이 정말로 있는지'를 묻고 답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교회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예배당보다 크십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람은 하나님을 교회 건물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는 이들도 있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7년 동안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지은 건물 안에 가둘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으면 예배드리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정해진 예배 시간에 교회라는 건물 안에 있었다는 것으로 큰 위안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가는 것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으면 불안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어디서든 예배드릴 수 있는데 교회 갔다 온 것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교회 못 가면 기도도 못하고 하나님도 못 만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이 중요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화면에 보이니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매주 만나 함께 예배드리던 교회 공동체가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외로워도 힘을 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공동체 지체들이 숫자로만 존재하지 않고 함께 신앙 생활하던 교회를 떠올릴 수 있으니 교회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부차적이지만 교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헌금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는데, 교회가 헌금 없이 돌아가는지요. 목회자들 사례비는 어디서 나오나요? 선교비는 또 어디서 나오고요. 이 시기에 개교회는 헌금의 소중함도 깨닫고 교회 재정도 살펴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모두가 소모적 논쟁을 피하고 다시금 교회공동체와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 사회로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기를 소망합니다. 3) 사회적 공감에 기반한 신학 패러다임의 전환 백종원이 <골목 식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식당 개선을 도와준 강원도 팥죽 할머니가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훔치며 "세상 참 거지 같네"라는 혼자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식당도 불이 나서 힘겨운 삶을 살고 계셨던 차에 백종원을 만나 도움을 받고 식당을 다시금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진단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 백종원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할머니와 영상 통화를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이런 탄식과 이런 눈물이야말로 '공감'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적어도 세상에 대해 이런 공감의 눈물을 흘리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사태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한다면, 교회가 세상에 대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는 자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저 세상에 대해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신 이웃사랑을 다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값싼 적선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본질적으로 교회가 공공 영역에 대해 가져야 할 신학적 교회론적 이론을 먼저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19로 인해 일부 교회의 예배 강행은, 앞에서 교회의 소중함은 이미 언급했지만, 세상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맹목적 믿음이 드러내는 비상식적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한국 교회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드러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신앙은 자신은 순교자가 될지 몰라도, 그 증상을 타자에게 전염시키면 그것은 엄연히 타자를 죽이는 것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면, 예배만 잘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바이러스에서 면역시켜 준다고 믿는 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님을 알아야 하죠. 믿음이 상식적 수준만 되어도 좋을듯합니다. 질병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병을 고침에 있어서 믿음이 그들의 전문 지식 위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 마치 게임 할 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교회가 안고 있는 것 같아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교회의 바른 모습을 위해 기본 신앙의 밑바탕에 있는 신학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을 속된 것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세상을 공부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와 떨어진 그 어디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이잖아요. 우리가 함께 호흡하는 곳이잖아요. 내가 내 쉰 날숨을 이웃이 들숨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내 쉰 날숨을 우리가 들숨으로 받아들이며 살잖아요.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내 쉰 날숨만을 골라서 들숨으로 받아들이나요? 아니죠. 어떤 경계도 없잖아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경계선만 그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가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곧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런 시국에 다시금 예수님의 성육신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육으로 오지 않으셔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시는가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구원하지 못하시는가요? 왜 굳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가요? 주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면 겪어야 할 여러 가지 고난을 생각하지 못하셨을까요?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오신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겪을 것을 아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오셔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4. 일상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코로나 19로 인해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우리에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혹시나 내가 걸릴 수 있고 혹시나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걸릴 수 있기에 그러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내가 걸리면 어떻게 해서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걸리면 얼마나 미안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겠습니까. 그러한 고난의 시기에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다시금 그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언젠가 동네 공원에 온 가족이 나가 시간을 보내다가 해거름 질 무렵 집으로 함께 돌아올 때 느꼈던 것은 일상의 작은 행복이었습니다. 행복이 뭐 별건가요? 들숨조차 내줄 수 있는 가족과 함께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지 싶습니다. 큰 것 이루지 못하며 필부로 살아간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제가 sns에 올리는 일상에 관한 글의 일차 독자는 아내입니다. 내가 쓰는 글을 읽으면서 때로는 서로 함께 겪은 일상이지만 자신은 자칫 흘리며 지나가는 사사로운 사건들을 남편이 글로 남겨 그런 일상을 공유하게 해 주니 그것이 좋답니다. 그리고 농담으로 그것 때문에 데리고 산다고 하네요. 허걱. 일상 속에 흘러가는 모든 것은 어쩌면 기억되지 않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남긴 기록은 가족의 추억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누구나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일상에 의미를 부여할 때에만 그 일상이 살아있는 삶의 요소가 되는가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그 일상의 한쪽 끝을 잡으려 손을 내밉니다. 무엇이 스쳐 지나갈까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매일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선물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선물을 준 자의 뜻이 분명히 그 속에 깃들어 있기에 그 뜻을 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물도 때로는 준 자에 대한 예의를 요하지요. 매일매일 주어지는 일상이 선물이며 은혜이기에 그 일상이 글이 되게 노래 되게 해 봅시다. 그러면 이 고난이 주는 시간의 의미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겠죠.   IV. 마치며: 영원에 잇대어! 비록 시대가 불안하여, 내가 들은 대로,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당신에게는 만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말해 줄 당신의 안내자들이 있다.어떤 시대나 타당한 진리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모든 요령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당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그러나 만일에 사정이 달라진다면 물론 당신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로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라는 시의 일부입니다.6 코로나 19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 코로나 19 이전의 신학과 이후의 신학, 코로나 19 이전의 교회와 이후의 교회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코로나 19사태를 건너면서 인간의 삶 또한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에 우리는 분명 배워야 합니다. 깃발의 펄럭임을 보면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의 방향을 알기 위해, 특히나 지금의 상황을 알기 위해, 영원에 잇대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중심은 없고 펌프질만 해대는 인생이 아니라, 중심을 잡고 견고히 가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시대를 우리와 연결해서 사고해야 할 것입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이 방에서 떠서 저 방으로 지지요. 대상 세계를 먼 곳에만 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필요도 있을 겁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에 대한 신정론적 질문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제기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몇몇 목사들이 그 원인을 어떤 특정한 사건과 연관 지어 설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인-결과 답변은 설득력이 전혀 없지요. 그리고 전 세계가 고난을 받고 있으니 무엇이 그 원인이라 해야 할까요? 다만 우리 모두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신정론을 물을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묻고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아삽의 시처럼,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시 77:8) 묻기도 합니다. 주를 믿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약속하신 약속을 분명히 성취하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심했던 이들이 어디 우리뿐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자체가 그 고난에 대한 다른 답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다시금 하나님께 조용히 나아가 그가 하신 말씀과 그가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묵상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삽처럼 우리도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시 77:12)이기를 소망합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죠. 고난 가운데 묵묵히 영원에 잇대어 말씀에 침잠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끔 외줄 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신기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 자체도 어쩌면 외줄의 폭 만큼만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외줄의 폭이면 인생길을 걷기에 족할 텐데 너무나 넓은 길을 차지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넓은 길을 걷다 보면 오히려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던가요? 그 길 자체가 자기 것인 양 걷게 되지 않는가요? 반면에 외줄 위의 인생은 신중합니다. 단 한 순간도 허튼 곳에 생각을 두지 않게 됩니다. 함부로 입을 열지 않게 됩니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목표를 향해 시선을 모으고 한 발짝씩 한 발짝씩 걸어가게 됩니다. 허우적거리는 두 팔을 보세요. 누가 저 공간을 허공이라 했던가요? 두 팔 뻗어 하늘을 잡으며 균형을 잡지 않는가요? 잡을 것이 저 하늘에 있는 것이지요. 오늘도 주어진 인생길, 보다 신중히 온몸과 정성을 다해 걸어가 봅시다. 그렇게 살아가 봅시다. 그러면 외줄 위에서 각(覺)하는 때가 오겠지요. 이번 코로나 19를 건너며 한없이 고독하게, 한없이 소통하며, 영원에 잇대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박동식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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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 기독교와 빨간 머리 앤
                        최휘운 독서논술 교사   <빨간 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이 책의 독자를 10대 소녀들로 예상했다. 그러나 남자 대학생, 할머니, 할아버지,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 등 전 세계의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수백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결국 앤 시리즈는 10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 앤이 기독교와 가깝다는 걸 모르는 이가 많다. 드라마나 전시회 등을 통해 '재해석'된 앤은 오히려 기독교와 정반대로 달리고 있고, 참된 앤은 점점 잊혀지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흔적들을 꺼내 보았다.   책 속으로 들어가기 전, 저자의 바탕부터 살펴보자.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의 선조들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캐나다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겼고, 성실했으며, 가족을 중시했고, 신념, 검소, 포부라는 전통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몽고메리는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을 쓸 때 미혼이었으나, 앤을 출판(1908)하고 3년 뒤 이완 맥도널드 목사와 결혼했다.   <빨간 머리 앤>은 나이 든 오누이가 남자 아이를 하나 입양하려다가 실수로 여자 아이를 입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앤은 우여곡절 끝에 커스버트 남매와 살게 되고, 처음으로 기도(祈禱)란 걸 배우게 된다. 마릴라는 기도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앤의 말에 놀라며 하나님은 아느냐고 묻는다. 앤의 대답은 이랬다. "하나님은 영혼이요,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시며, 그 안에 지혜와 힘과 거룩함과 정의와 선함과 진리가 있어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내용이다(제4문 답). 앤은 이를 어디서 배웠을까? "고아원의 주일학교에서요. 교리문답서를 모두 외우게 했거든요. 저는 그걸 좋아했어요. 거기엔 멋진 단어들이 많거든요.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시며', 참 장엄하지 않아요? 마치 커다란 오르간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꼭 시(詩)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처럼 들리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주기도문(主祈禱文)을 배운 후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게 좋아요. 주기도문은 아름다워요. ··· 이건 시는 아니지만 시와 같은 감동을 줘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이건 한 줄의 음악 같아요. 아, 이걸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서 참 기뻐요." 이런 앤이지만 모든 기도를 기뻐하는 건 아니다. 벨 장로님의 기도에는 비판적이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얘기하고 있었고, 기도하기를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제가 보기에 장로님은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앤이 닮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 "종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정말 몰랐어요. 전 항상 종교는 약간 우울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앨런 부인의 종교는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앨런 부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요. 전 벨 장로님 같은 기독교인은 되고 싶지 않아요." 마릴라는 엄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벨 장로님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는 건 아주 버릇없는 짓이야. 벨 장로님은 정말 좋은 분이다." 앤은 수긍하지만 예리하게 덧붙인다. "물론 좋은 분이죠. 하지만 벨 장로님은 신앙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얻는 것 같지는 않아요." 목회자는 이렇게 본다. (조건을 주시하라) "제가 남자였다면 목사가 되려고 했을 거예요. 신학적으로 올바르다면 목사들은 사람들에게 좋을 영향을 줄 거예요." 성도(聖徒)의 교제엔 이런 반응이다. "목사님 부인(夫人)과 친구가 되면 여분의 양심을 더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스스로에 대한 고민도 한다. "전 정말 착해지고 싶어요. 마릴라 아주머니나 앨런 부인이나 스테이시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들고, 이분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일만 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와 있을 땐, 전 늘 아주 못된 아이가 되는 것 같고, 아주머니가 못 하게 하시는 일만 하고 싶어져요. 참을 수 없이 그런 유혹을 느껴요. 제가 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너무 못되고 신앙으로 거듭나지 못해서 그런가요?" 앤은 쾌활한 소녀지만, 반성(反省)의 소녀이기도 하다. "자수정 브로치 사건을 계기로 제 물건이 아닌 걸 함부로 만지는 버릇을 고쳤고요. 유령의 숲은 상상에 빠져서 헤매는 버릇을 고쳐 주었어요. 진통제 레이어 케이크 사건은 요리할 때에 부주의한 제 습관을 없애 주었잖아요. 또 머리에 염색을 해 본 뒤로는 허영심도 고치고요. ··· 오늘 실수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걸 좋아하는 버릇을 고쳐 줄 거예요." 이제 <빨간 머리 앤>의 마지막 문장을 밝힐 차례다. 사실 이 문장은 작품을 끝까지 읽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적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고민했으나, 기독교의 흔적을 내놓기로 했으니 마저 쓴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부디 작품 전체를 읽어 이 구절을 다시 만나게 되길 소망한다. 진심으로. 간절히. "하나님은 천국에 계시고, 세상은 공평하도다." 최휘운(독서·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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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 평화나무, 설교자를 고발하다
    최덕성 박사   유튜브 시사평론 방송을 하는 평화나무(이사장 김용민)는 설교 중에 정치발언을 하거나 특정 정당을 지지 반대한 12명의 대형교회 목사들을 사법에 고소할 것이라고 한다(평화나무는 2일 10명의 목회자를 추가로 고발할 계획임을 밝히기도 했다-편집자 주). 설교 중에 공직선거법에 저촉되는 발언을 한 개신교 목회자들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고 또 경찰에 고발할 것이란다. 4월 15일까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선거법 위반 사례가 드러나면 법적 조치를 할 예정이다. 주일설교와 자료물 등에서 특정 정당과 정치인, 특히 주사파 정치인들에 대한 낙선을 유도한 설교자들을 고발한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공명선거의 모범이 되는 원년을 만들겠다고 한다.     평화나무는 또 “예배 설교 중 선거법 위반 사례에 대한 신고포상 캠페인을 벌인다”고 밝혔다. “총선 선거운동 개시일인 4월 2일부터 15일 투표 종료 시점까지 발생하는 불법선거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신고를 받는다. 예배 중 사회, 기도, 설교, 광고 등 순서에서 특정 정당과 후보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 발언을 한 목회자가 신고 대상자이다. 누구나 신고할 수 있으며 신고자의 신상은 철저히 보호한다”고 한다. 또 “신고된 사안 중 최종 유죄 확정판결을 받을 경우 포상금 20만원을 추가 지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유관기관으로부터 법 위반 유권해석을 받은 시민 신고 건에 대해서만 추가 포상금을 지급한다고 했다.   평화나무가 거론하는 설교자는 12명이다. 김종준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 이성화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반기독교세력대응위원장), 이은재 목사(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변인, 전 순국결사대총사령관), 심하보 목사(은평제일교회), 정동수 목사(사랑침례교회), 손현보 목사(세계로교회), 허남길 목사(양산 온누리교회), 박경배 목사(송촌장로교회), 김성일 목사(광명 한소망교회), 김진홍 목사(동두천두레교회), 고병찬 목사(운정참존교회), 이한의 목사(부산은항교회) 등이다. 이들의 설교가 현행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평화나무의 고발대상 후보군에 포함되어 있는 손현보 목사는 부산지역에서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주목할만한 설교자이다. 매 주일 예배를 유튜브로 동시방송을 하고 있다. 손현보 목사는 2020년 2월 23일 주일예배에서 ‘좌파와 우파 그리고 기독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시편의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삼았다. 설교 중에 청와대와 여당에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추종하는 주사파’가 잠입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좌파 주류는 ‘주체사상파’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중도 우파’이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 주사파 인사들을 끌어들였다, 기독교인은 좌파가 될 수 없다고 설교했다.   손현보 목사는 전·현직 청와대 비서관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상당수가 주사파이고, 학생운동 출신이고,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찬성, 2010년 천안함 대북 규탄 결의안 반대, 2014년 미국 북한인권법 제정 항의 서한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라고 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신동호 연설비서관,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윤건영 전 국정기획상황실장, 조국 전 법무부장관 등 실명까지 직접 거론했고 이들이 주사파라고 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토지공개념’, ‘동일노동 동일임금’, ‘종교 재편’ 발언을 거론하며 “투표를 통해서도 정말 주체사상파[에 속하는] 이런 사람들을 국회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좌파의 기원을 프랑스혁명의 자코뱅당에서, 우파의 기원을 미국 독립혁명에서 찾는다. 자코뱅당이 반종교(반기독교), 무신론, 이성숭배, 사유재산제도 부정, 시장경제 거부, 이혼·동성애 장려 등의 정책을 펼쳤다고 했다. 이 좌파 사상을 출발점으로 삼아 공산주의,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등이 나왔다고 했다. 손현보에 따르면, 우파는 개인의 자유, 양심의 자유, 교회의 자유, 철저하게 자유를 가르친다. 프랑스혁명에서 기원한 자유는 전통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지금까지 내려왔던 모든 제도, 법, 종교, 전통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수립된 사회제도로부터의 자유, 종교로부터의 자유, 규범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들은 성경적인 모든 것들을 다 거부했다. 좌파는 반기독교에서 나왔다.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부모, 교회, 목사, 어떤 권위 이런 걸 인정하지 않는다. 좌파는 신을 배격하고,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우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한다. 전자는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나눠주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후자는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며 노예제 폐지, 신분제 폐지에 앞장섰다.   또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추종하는 주사파’가 청와대와 여당에 침투했다고 했다. 그리고 “주사파들은 이승만을 가장 싫어한다.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는 북한처럼 통일이 되었을 것”이라며 “이승만이 나중에 독재도 했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이 정말 역사를 잘못 알고 있다. 3.15 부정선거의 책임은 전적으로 이기붕에게 있다. 이승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승만은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진 사퇴했다. 독재자가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는가? 이승만은 딱 내려놓고 하와이로 그냥 가버렸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설교 중에 ‘주사파 전대협·운동권이 장악한 청와대’라는 제목의 사진영상 화면을 신도들에게 보여주며 “한국에서 이렇게 김일성이의 이념을 추종하는 주사파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사진을 한 번 보겠다. 청와대 안에 있는 사람, 이번 문재인 정부 들어 청와대 안에서 주사파로 있는 사람, 주사파와 전대협 이런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구약의 엘리야, 나단 선지자 등을 거론하며 “선지자가 정치나 왕한테 관여를 안 했나. 모든 선지자들은 불의한 정권에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좌파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바, 기독교인은 이런 좌파가 될 수 없다. 좌파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는 아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우파지향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토지공개념’, ‘동일노동 동일임금’, ‘종교 재편’ 발언을 거론하며 이것들은 전체주의국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라고 했다. 토지공개념은 공산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교인들 중에 좌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웅크리고 있다가 “교회가 끝나겠구나”하는 오늘에 이르러 목사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공산주의 국가 중에 잘 사는 나라가 없다고 하면서 쿠바를 예로 들었다. 동일임금을 실현한 쿠바는 의사나 청소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20달러 밖에 못 받는다고 했다. 이어 성경의 달란트 비유를 들면서, 열 달란트 받은 자도 있고, 더 남긴 사람은 더 가져야 되는 것이다. 심지어 없는 것을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주라고 했다며, 우파는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 ‘자기가 노력한 것만 가져가야 된다’ 이것이 평등이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평등이지, 공부하지 않는 자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자가 똑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우리나라가 현재 역사적인 기로에 서 있다고 했다. 5년, 10년 만에 ‘나라가 완전히 망할 수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을 하면 “섬뜩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기독교가 진정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고 했다. 이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면 안 된다고 했다. “투표를 통해 여러분들이 정말 주체사상파 이런 사람들을 국회에 보내서는 안 된다. 우리 기독교를 죽이려고 한다”고 했다. 자신은 정치적으로 어느 정당에 가입해 있지 않다고 했다. 손현보 목사는 설교를 마무리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이 악인들은 심판하고 대한민국을 통해 온 세계가 복음화 되도록 한국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해 달라고 간구했다.   교회는 교회법을 따른다. 설교는 교회법 구도에서 평가할 사안이다. 설교 강단을 정치에 오용함은 잘못이다. 그러나 시대를 분별할 목적으로 정치적 변화와 사상의 흐름을 알려주고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철학, 역사를 소개하는 것은 교회의 고유한 권세에 속한다. 설교자는 교회 안의 기독인들을 향해서만 외치는 자가 아니다. 자기 시대를 향해 외치는 메신저이다. 시대를 본받지 말라고 외치는 자(롬 12:2)이다. 설교는 국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다. 교회의 강단은 설교자가 자신이 믿고 신앙하는 바를 설교하는 곳이다. 설교 강단은 특정 정치 유형이 기독교 신앙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며 그 기원을 가르치고 기독인들에게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지식과 기준을 제시하는 곳이다.   삶의 정황과 사회와 정치 현실과 동떨어진 설교는 호소력을 지닐 수 없다. 선거철의 설교자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성경적 가치와 기독교 세계관을 변호하고 지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기독인이 명심해야 할 세상 이념의 역사와 배경을 알려 주고, 무엇이 위험하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칠 선지자적 혀를 가진 자이다. 손현보 목사는 탁월한 설교자이다. 호소력을 지닌 매력적인 설교를 했다. 시종 설교 원고를 보지 않고 단호하고 간명하게 세상 분별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했다. 신도들이 호흡하며 막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현 시대 정치의 사상적 흐름을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소개했다. 손현보의 설교는 성경본문 강해가 아니었지만 탁월했다. 시의성 있는 설교였다.   손현보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들을 국회로 보내지 말라는 요지로 설교했다. 교회법과 선거법의 대 충돌이 예견된다. 설교자를 사법에 고발하는 행위는 교회의 권세,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폄하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설교 방해에 해당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김용민과 궤를 같이 하는 소위 기독교 진보 진영의 교회들를 목회하는 다수의 설교자들은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가? 오랫 동안 해방신학, 민중운동, 혁명, 하나님의 선교 등의 프레임에 따르는 설교, 강의, 행동을 해 왔다.   <위키피아> 정보에 따르면, 평화나무 이사장 김용민(1974년생)은 장로교회의 목사의 아들이다. 강남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시사평론가와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 때 <뉴스앤조이> 편집장을 역임했고, 팟캐스트 진행을 하기도 했다. 마르틴 루터처럼 교회개혁에 앞장서고 싶어 한다고 한다. 설교자들을 고발하려는 까닭은 설교의 자리에 세속 정치와 선거법에 위반되는 메시지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용민은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발언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보지맛 오징어 보징어”, “피임약을 최음제로 바꿔서 피임약이라고 팔고는 안에는 최음제에요” 등의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 정치적 ‘좌파’ 편향성을 보인다. 김용민은 도올 김용옥과 마찬가지로 한신대학교와 관련된 진보계 기독교의 ‘변종 신학’에 익숙한 우리 시대의 기인으로 보인다. 설교자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거나 성경적 가치를 저해하는 정치운동과 정당활동을 경계하도록 설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있다. 교회법과 국가법 사이에 서 있다. ‘전도폭발’이라는 전도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복음전도에 이바지한 제임스 케네디 목사는 여러 차례 주일예배애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설교를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공산주의 비판하는 설교자가 적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설교자는 교회법과 신학 프레임만이 아니라 국가의 공직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불가피할 경우도 없지 않다. 설교자는 두 법의 대척점에 있다. 뱀같이 지혜롭게 해야 할 의무와 순교정신으로 대응해야 할 처지이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정치 마르크시즘과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 마르크시즘에 시달리고 있다.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를 보아야 하는 위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다수 기독인들은 주사파 정치인들, 혁명적 사회주의자, 민주노총, 전교조 등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좌파 정치권력 안에 기생하며 대한민국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쳐야 할 목사가 교인들에게 세상 풍조와 사상의 흐름과 위험성을 주지시키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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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4-03
  • 예배 없는 목회 사역 이야기
      ▲조건회 목사 코로나19’ 목회자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예배·집회·심방이 중단된 지금, 목회자들로부터 현재 신앙생활 이야기를 들어봤다.   기존 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면서 예배를 사모하는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 더욱 중보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교역자들과 매주 1권씩 ‘기도’에 관한 책을 읽는 시간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요즘에는 ‘지키는 기도’라는 책을 읽는데 참 좋더라고요.내 양 떼와도 같은 성도들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교회 내 구역장들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성도님들의 기도제목을 모았습니다. 이를 두고 날마다 교역자들과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수요오전예배에는 예배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시리즈 특강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주봉 목사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까지는 외부사역도 많고, 늘 바빴습니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사역을 할 수 없게 되니 개인적으로 휴식도 얻으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히 교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교회에 매일 온라인 예배로 오전 10시에 기도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30분간 주제 설교 후,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하죠. 300명 이상 매일 참석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님이 기도회 시간이 좋다고 피드백을 전하더라고요. 그래서 코로나19가 지나가더라도 오전, 저녁 기도회는 계속 진행할 예정입니다   ▲장헌일 목사   70세 이상 어르신들이 어떻게 이 시기를 잘 보내실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유튜브로 설교를 진행하더라도 이용방법을 몰라서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설교 후에 문자로 설교를 정리해서 보내드리고 전화 심방을 진행하고 있는데, “빨리 교회에 가고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노인 대학은 중단됐고, 매일 식사를 제공하던 쪽방촌 독거노인 사역은 요일을 지정해 일주일분 대체식사를 준비해드리고 거동이 어려운 분들은 직접 찾아가 전달하며 한 분씩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 작은 위로와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동영 목사   이 시기를 통해 그동안의 사역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 목회를 하는 목회자로서 청년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제법 익숙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사역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부족했던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의 특성을 파악하며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한데 목회자로서 그런 노력들이 부족했던 게 보였습니다.코로나를 기점으로 한국교회 사역의 틀이 좀 바뀌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됩니다. 청년들과 소통하는 다양한 루트를 모색하고 있고, 대면하지 못하는 현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청년들의 진중한 삶의 고백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많이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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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4-03
  • “북한 향한 그의 열정, 가슴 속에 영원히”
    故 손인식 목사   2017년 3.1절 통곡기도대회를 섬긴 목회자들과 당시 북한 인권 탄압을 증언한 탈북간증자들이 함께 했다.   故 손인식 목사와 북한 인권과 자유화를 위해 힘써 온 ‘그날까지 선교연합’(UTD-KCC) 공동대표 박희민 목사, 송정명 목사, 김인식 목사와 고인과 함께 통곡기도회를 개최하며 북한 복음화를 위해 기도운동을 일으켜온 기쁨우리교회 김경진 목사가 추모사를 전하며 북한 선교를 향한 고인의 뜻을 되새겼다. 나성영락교회 원로 박희민 목사는 “故 손 목사님은 누구보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잃어버린 영혼과 상처 받은 심령들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섬긴 헌신적인 종이었다”며 “비록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가 보여준 인격과 믿음의 삶, 사랑의 실천과 복음 증거, 선교를 위한 열정은 우리의 가슴속에 가장 값진 유산으로 영원히 간직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미주 평안교회 원로 송정명 목사는 “故 손 목사님은 탈북자들의 형이요, 오빠요, 대부였다”며 “수많은 탈북자들의 상처 받은 마음을 싸매주고 치유했으며, 1세기의 위대한 전도자 바울 사도의 고백 같이 선한 싸움 잘 싸우셨고, 믿음을 지켜 달려갈 길을 잘 마셨다”고 회고했다. 웨스트힐장로교회 원로 김인식 목사는 “‘남북이 하나 되어 민족과 세계를 섬기는 가운데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꿈’은 故 손 목사님의 꿈이자 남아있는 우리들의 꿈”이라며 “손인식 목사님을 추모하며 그의 꿈을 가슴에 새기고 달려가자”고 촉구했다. 기쁜우리교회 김경진 목사는 “故 손 목사님은 호탕한 웃음과 인자한 눈길, 부드러운 음성과 유머 넘치는 말씀과 따뜻한 가슴으로 힘들고 지친 후배 목회자들이 기대고 싶은 큰 나무 같은 분이셨다”며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북한 동포들과 민족의 염원이며 한민족 자유 평화통일을 위해 에스라처럼, 느헤미야처럼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 자신을 불태우셨다”고 회고했다. 이하는 추모사 전문. 지성과 영성, 덕을 겸비한 신실한 목회자였다   그날까지 선교연합 공동대표, 나성영락교회 원로 박희민 목사   우리가 사랑하며 존경하던 손인식목사께서 소천하므로 먼저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를 환송하는 사모님과 자녀들, 유가족들. 그리고 베델교회 성도들과 고인을 사랑하던 모든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주님의 위로하심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지만 죽음 앞에서 드릴 위로의 말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와 영생과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승리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삶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습니다. 삶과 죽은은 우리 인생을 떠받드는 두 개의 기둥과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비법하고 위대하게 살려면 죽음을 바로 이해하고 어느 정도 죽음을 뛰어남 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죽음마저 조소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 복된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이 참되고 진실하며, 사랑이 충만하고 베풀고 나누며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잇대진 삶이 되어야 합니다. 손 목사님은 베델교회가 어려운 시기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미주 최대의 한인교회의 하나로 성장시켰습니다 은퇴 후에도 UTD/KCC를 통해 탈북자를 섬기며, 북한동포의 자유와 해방 및 복음화 그리고 통일을 위한 통곡기도회 사역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제가 지난 30년 이상 사귀고 이민교회와 UTD/KCC를 함께 섬기면서 발견한 것은 손 목사님은 지성과 영성과 덕성을 겸비한 신실한 목회자이며,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의 종이며, 주님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며 잃어버린 영혼과 상처 받은 심령들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섬긴 헌신적인 종이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믿음과 섬김의 종으로서의 리더십을 본보여 주셨습니다. 그를 통해 놀라운 역사와 사역을 이루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가 보여준 인격, 믿음의 삶, 사랑의 실천 복음 증거와 선교를 위한 열정은 우리의 가슴속에 가장 값진 유산으로 간직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사모님과 자녀들과 유가족에게 주님의 위로하심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5년 북한 구원을 위한 미주 투어 기도회를 소개하는 김인식, 송정명, 박희민, 손인식 목사(왼쪽부터)   목사님께서는 탈북자들의 형이요, 오빠요, 대부셨습니다   목사님 할 일이 그렇게 많은데 어찌 그리 빨리 가셨습니까? 그래서 지난 3월 26일 제 꿈에 찾아오셔서 그동안 감사했다고 웃으시면 인사를 하신 것인가요. 차라리 '그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고 있습니다. 목사님과 동역을 해온 기간이 20여 년 간이 되네요 그동안 보아왔던 목사님은 남을 칭찬 해주고 세워주는 일이 몸에 배어 있는 신실함과 겸손함이 겸비된 하나님의 종이 었습니다. 일에 대한 열정과 비전과 추진력이 대단한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셨습니다. 오늘의 베델 한인교회가 이민 한인교계에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의 눈물과 땀과 몸부림의 열매였다'는 사실은 수많은 동역자들이 수긍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찢기면서 짐승 같이 살아가고 있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그 뜨거운 열정은 언제부터 가지셨습니까? 목사님은 탈북자들의 형이요, 오빠요, 대부였습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의 상처받은 마음들을 싸매주고 몸부림을 쳐왔기 때문에 지금 수많은 탈북자들이 목사님의 소식을 듣고 오열하고 있을 것입니다. 북한 동포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통곡하며 기도 해왔던 일이 얼마나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미주 땅 구석구석을 누비고 한국땅 방방곡곡을 찾아다니고 멀리는 구라파까지 찾아가서 잠들어 있던 목회자들을 흔들어 깨우고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통곡 기도회를 이끌어 나가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차례 동행했던 기억이 나기 때문에 가슴이 쏴 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LA 지역, 오렌지 카운티 지역, 얼바인지역, 워싱턴 DC ,한국의 여러 지역 멀리는 동독 땅 라이프치히 지방까지 같이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많은 통곡 기도회 가운데 독일 라이프 친히 에서 열렸던 그 기도회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2012년도 1월 31일부터 4-5일간 계속된 기도회 같습니다 그 당시 구라파 지역에는 영하 16-17도를 오르내리는 한파가 계속되고 있어 400여 명이 넘는 동사자가 나왔다고 매스컴이 대서특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니콜라이 교회가 동서독 간의 통일을 이루어낸 기도의 요람이었던 것을 안 이후에 목사님이 먼저 답사를 하고 교섭을 해서 기도회를 열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에 알았습니다 구라파 지역과 한국 그리고 미주 지역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 50여 명과 베델 교회 교인들 20여 명이 함께 참석을 했습니다. 새벽 5시에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모인 새벽 기도회는 미끄러운 얼음판을 조심조심 걸어가서 모였습니다. 냉기가 감도는 본당에서 뜨겁게 기도 했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했던 것도 지금 기억됩니다. 아침 식사를 끝낸 일행들은 손에 손에 “Freedom for North Korea”라는 팻말을 들고 구호를 위치면서 시가행진도 했습니다. 라이프치히 에 있는 북한 대사관 앞에 가서도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도 했습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는 말에 얼어붙어 있는 아스팔트 길에 응거 주춤 무릎을 꿇고 30여 분간 정치범 수용소를 철폐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잎술이 덜덜 떨리는데도 목사님은 성명서를 큰 소리로 다 읽어 내려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 독일 경찰들이 우리 시위대를 앞뒤에서 호위해 준 일입니다. 전 이런 현장을 오랫동안 기억해두고 싶어 제가 쓴 책에 기록을 해 두었습니다. 이런 귀한 일들을 남겨 두고 목사님이 먼저 가시면 누가 이런 일들을 계속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지난 10월 31일 목사님이 예기치 않는 사고를 당하신 후에 목사님이 계시던 병원을 몇 차례 찾아봤는데 그때마다 눈을 감고 계시고 대화가 되지 않아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2월 18일에 찾아뵈면서 목사님의 이름을 몇 차례 불렀더니 실낱같은 눈을 뜨시길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습니다 얼른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제 가슴에 오랫동안 남겨 두고 싶은 좋은 친구입니다 그래서 미주 복음 방송국에서 목사님이 진행하고 있던 칼럼 방송도 제가 대신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지금 까지 1세기의 위대한 전도자 바울 사도의 고백 같이 선한 싸움 잘 싸우셨습니다. 달려갈 길도 잘 달려가셨습니다. 믿음도 잘 지켰습니다. 이미 우리 주님이 일어나셔서 “손 목사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말씀하시면서 품에 안고 등을 두들겨주고 계실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면류관도 받으셨죠? 아쉬운 것이 있다면 목사님을 마지막 보내는 천국 환송 예배 사간에 수많은 동역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자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통해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04-02
  • 질문 없는 교회
      안지영 목사   내가 고등학교 시절 처음 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은 성경에 관한 의문이었다. 처음 교회에 출석하면서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어찌 성경 내용이 다 이해가 될 것인가?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모든 게 당연한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질문 대상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거나 가르치고 나면, 설교나 강의에서 생긴 의문점을 가지고 그분들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태도를 처음에는 어느 정도 받아주는 듯했으나, 점점 귀찮아하고, 나중에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만 했다.   성경의 내용에 의문이 생긴 것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무조건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만약에 그 궁금증이나 의문을 가슴에 묻어둔다면, 그 믿음이 과연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믿음이 될 것인가? 나는 그 시절에 교회에서 듣는 내용에 대해 생기는 질문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에게 얘기했다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자, 교회의 장로님이나 집사님들, 그리고 대학생 형님 누님들께 물었지만, 그분들도 아무도 답을 해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분들도 내가 가졌던 의문점을 궁금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예 '궁금증 모드'를 가질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라 추측해 본다. 교회에서는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가르치며 암시한다. 현재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새가족반에서 그동안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경 본문을 다룬다. 그런데 이 본문을 다루면서 제일 먼저 그분들이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질문하기’이다. 그동안 당연시 여겼던 내용인데, 그 익숙한 내용에서 질문을 찾으라고 하니 적이 당황하는 모습이 태반이다. 그러면, 내가 그 본문에 해당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어떤 이들은 이 내용에서 저런 질문이 나오는 것에 신기해하고, 어떤 이들은, 사실 자기도 그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는데, 분위기가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질문하면, 자기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을까 봐 적잖이 망설이다 포기하였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목회자가 설교 시간이나 성경 공부 시간에 가르치는 것을 무조건 ‘아멘’하고 받아야 하는 분위기가, 그 설교나 성경 공부 중에 생긴 의문점을 해결하려는 교인들의 시도를 막아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게 습관이 되면, 더 이상 질문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린다. 목회자가 무엇을 얘기해도 무조건 ‘아멘’이다. 설교 시간에 “십일조를 안내면 암에 걸린다”고 해도 무조건 ‘아멘’이다. 그렇게 큰 교회에 적어도 지성인들이 어느 정도 있을 텐데, 이런 설교에 대하여 ‘왜 그렇지?’라고 의문점을 가진 지성인들은 없는가 보다. 만약에 그 설교 내용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면, 머리로 판단하는 인본주의적인 자로 매도될까 봐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태도를 가진 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이렇게 질문 없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어릴 때부터 성경에 대해 던지는 아이들의 질문에 곤혹스러워한다. 그리고는 그런 질문은 아빠 엄마도 잘 모르니, 교회 목회자들에게 물어보라고 넘긴다. 그런데 목회자에게 넘겨진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어린 나이 때부터 ‘의심하지 말고 믿는 것이 참 신앙’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교회에서 정해놓은 틀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면, 신앙 있는 청년이 되는 줄로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더 넓은 세상에 놓이게 되고 날카로운 도전을 받을 때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위축되고 마는 경우를 너무나 흔하게 목격한다. 이런 자녀들을 보고 부모들은 당혹해한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아이들은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고 배웠고, 그 틀 안에서 순응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신앙을 유지하게 된 자들은 다시 부모가 되었을 때, 당연히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는 신앙교육을 교회에 전적으로 떠맡긴다. 그것은, 자신들의 경험에 의하면, 성경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무척 많은데, 그 의문점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니, 믿는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그러니 어찌 아이들의 질문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아이들에게도 그냥 “그냥 믿어. 의심하면 안 돼. 믿음 떨어져. 구원 떨어져!”라고 할 것인가? 반면에, 자신이 그 의문점들을 고민한 적이 있고, 그것을 풀어보았던 경험을 가진 부모는 아이의 질문에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흥미롭게 여기고, 자신이 나름대로 발견한 것들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대물림의 한 부분이다. 혹시, 그 질문이 다 풀리지는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탐구했던 과정을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아이들은 부모를 이어 그 질문을 위한 탐구를 이어갈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나누는 과정을 통해 성경을 좀 더 친숙하게 느낄 것이기에 나름의 탐구가 가능해질 것이다. 다음은, 스탠포드대학교의 교육대학원에서 최고기술책임자와 부학장으로 있는 폴 킴의 대담 일부를 녹취한 내용이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무서운 사회예요. 쉬운 걸 찾는다. 편한 것만 찾는다. 생각하기 싫다. 어떤 사회적인 현상이 일어났을 때, 뭘 그걸 질문을 해? 그냥 그런가보다 그러면 되지. 질문하지 않는 사회에는 변화가 없고, 배움도 없고, 혁명도 없어요. 우리나라 최근에 큰 질문을 했잖아요. (촛불집회에서) ‘이게 나라냐?’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에 변화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게 나라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원래 그랬으니까 그렇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얘기하면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사회가 될수록 배움이 없고, 변화도 없고 혁신도 없는 거예요. 그런 것이 없을 때 위험한 사회가 된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요.” 폴 킴의 말을 근거로 현재 교회 현장을 진단해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들썩거리고 있다. 공포감이 밀려오자 인간의 숨어있던 속성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이 바이러스의 강한 전염성 때문에 공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응이 다양하게 튀어나온다. 예배당에서 예배 의식을 거행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죽으면 죽겠다는 식으로 예배당으로 모이는 교회가 있다. 예배를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권고를 두고 교회를 핍박한다는 식으로 저항한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오게 되어, 그들이 교회당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옮기게 되는 형국이 벌어진다. 자신은 순교자가 되겠는 지는 모르지만,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가 보다. 이렇게 ‘묻지 마 신앙’에 전도된 자들의 행태를 보면 신천지 집단과 무엇이 다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목회자의 말에 거역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내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거역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들의 가르침에 아무런 의문을 제기해 본 적이 없기에, 그 지시를 거부하는 것 또한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바로 그 교회는 위험한 교회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가 타격을 입을 것이니 말이다.   이번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를 계기로 지금까지 행하여 왔던 ‘예배’에 대한 질문이 수없이 터져 나오게 될 것이다. 더불어 그동안 수면 밑으로 눌러 두었던 신앙에 대한 여러 질문이 수면 위로 마구 떠 오를 것이다. 어쩌면 목회자는 성도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예상치 못한 상황을 통해 생겨난 질문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할 때다. 만약에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태도라는 식으로 암암리에 누른다면, 그 공동체의 체질은 허약해질 것이다.   질문을 가지고 오는 교인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 질문이 참 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라면, 솔직하게 현재 상황을 인정하고 함께 그 질문을 풀어갈 길을 연구하기를 제안한다고 해서 교인들이 목회자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태도를 보고 목회자를 더 신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던져지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 되고 있다.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껍질이 아니라 그 속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질문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져야 한다.   어떤 질문이라도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진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던지는 질문이라면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무시할 질문은 없다.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한 질문이지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떠한 질문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진지한 질문, 솔직한 질문을 왜 하나님이 싫어하시겠는가? 궁금증을 가지고 나오는 우리를 왜 귀찮아하시겠는가? 기탄없이 질문하시라. 진지하게 탐구하시라. 아는 것만큼 우리는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안지영 목사(달라스 나눔교회, 미드웨스턴 실천신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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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4-02
  • 코로나 확진 후 퇴원 목회자 “예수는 나의 치료자”
    마크 매클러그 목사. ©트위터 캡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 치료를 받고 퇴원한 목회자가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유했다고 지난 30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크리스천투데이가 보도했다. 북아일랜드 지역의 다운 카운티에 거주하는 마크 맥클러그 목사는 일주일간 집중 치료를 받고 난 후 퇴원하면서 의료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맥클러그 목사는 자신의 SNS에 병원을 떠나면서 "기도해주신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생명을 구해주신 의료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했다. 예수님의 나의 치료자이시다"라고 글을 올렸다. 그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기도 요청을 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라"고 호소했다. 그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 이웃에게 전화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현명하고 친절하라. NHS를 보호하자"고 글을 올렸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04-01
  • “코로나19... 예배 방식의 장기적인 변화 대비해야”
      NAE 월터 김 대표. ©Robby Dob Productions, Inc.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교회가 장기적인 예배방식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같은 주장은 지난 26일(이하 현지시간) 전미복음주의협회(NAE) 월터 김 대표가 주최한 '코로나19 교회 온라인 서밋'(COVID-19 Church Online Summit) 패널 토론에서 언급됐다고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가 보도했다. 다양한 교단의 임원들이 참석한 이 모임에서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총감독 더그 클레이(Doug Clay) 목사는 "최근 교단의 정신건강위원회가 코로나19 확산 기간 동안 목회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며 "현재 지도자들 사이에서 유포되고 있는 9가지 모범 사례 목록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목회자들은 또한 의사 결정과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신뢰할만한 동료를 찾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이들은 뉴스 시청을 줄이거나 안정된 신체적, 정서적 리듬을 찾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보고 휴식을 취하고 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개인적 예배를 드리고, 통제 할 수 있는 사항만 통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사항에 의해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조언했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희망을 찾으라고 덧붙였다.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의 사무총장인 콜린 왓슨(Colin Watson) 목사는 "목회자들이 전염병에 대한 빠른 해결책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장기적인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단지 몇 주 안에 고쳐질 단기적인 문제가 아니다. 장기적으로 일부 관행과 리듬을 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왓슨 목사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 많은 논의를 하고 있다며 "우리는 사회적 친밀함을 원한다. 교회가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전화나 인터넷 사용 여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도자들은 예배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도록 돕는 교회 운동인 '컨버지'(Converge)의 스콧 리드아웃(Scott Ridout) 대표는 "온라인 모임을 촉진하고 목회자들의 필요에 따라 가장 적합하게 구축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며 "불확실한 시기에 사람들은 명확성과 민첩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또한 기도제목에 대해서도 공유했다. 왓슨 목사는 "지금 우리의 교회와 목회자, 사역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많은 기도가 있었다. 이 시기에 분명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원한다"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전염병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해왔다. 이 기간 동안 교회가 연합되기를 기도하며 특히 이 시점에서 위대한 증인이 되기를 원한다"며 "공동체 전체를 위한 기도 뿐만 아니라 특히 지금 우리 민족을 위해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도록 기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드아웃 대표는 "우리의 포트폴리오의 가치는 떨어지지만 기도의 가치는 높아지고 있다"며 "우리가 의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며 시편 146편과 46편을 읽으며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사람들은 희망을 찾고 있다. 그들은 TV에서 절망을 얻지만 여전히 희망을 찾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찾을 것"이라며 "저의 기도제목은 깨어 있는 것이다. 이 기간이 기도의 '팬데믹'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이것(코로나19)을 그 분에게로 이끄는데 사용하시길 기도할 것"이라고 전했다고 CP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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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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