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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유기성 선한목자교회 목사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인류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교회도 그 영향을 비켜갈 수 없을 것이기에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모든 것을 아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느낀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한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에스겔 선지자도 고통스러워했습니다.(겔 22:30) 지금 우리의 두려움은 미래 예측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한 사람을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깨달아야 합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게 고통스러운 데는 가시 같은 사람,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반대로 한 사람 때문에 살 희망을 품게도 됩니다. ‘나 한 사람인데’가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살면 나라가 살고 ‘나 한 사람’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코로나19가 한 사람으로부터 수많은 사람에게 퍼져가듯이 한 사람으로 나라가 타락하고 나라가 살 수 있습니다.한경직 손양원 목사, 유관순 열사는 1902년 같은 해에 태어나셨습니다. 세 분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요. 예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 그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이 기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주님의 증인 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찾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빠른 길입니다. “주여, 저를 주님께 드리니 저를 증인으로 삼으소서” 하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우리가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하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책임지라고 하면 절망일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답하셨습니다.(요 6:28~29)하나님의 일이란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하나면 되는데 그것도 못 한다고 하겠습니까.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입니다.예수동행운동을 하면서 주님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상관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가라 하십니다. 화려하고 큰 것에 매이지 말라 하십니다. 작아도 진실하고 순전함을 지키라 하십니다. 적은 수라도 진심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삶을 나누라 하십니다. 그러면 다음은 주님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우리가 ‘나는 죽었다’ ‘나는 예수님으로 산다’ 선언하며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 것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종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코로나19 이후 어떤 변화가 오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에 분명히 서서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한국교회와 우리나라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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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자식을 사랑한다면...부모들이여 저항하라!
    홀리씨즈교회 SDC인터내셔널스쿨 학생들이 2017년 5월 서울 총신대 ‘사랑해孝 콘서트’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홀리씨즈교회 제공  프랑스에 콘스탄스(Constance)라는 감옥이 있습니다. 콘스탄스는 ‘의연함, 집요함, 인내, 저항’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감옥은 직경 22m 높이 33m 벽의 두께 6m이며 해자로 둘러 쌓여있습니다. 아주 작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줄기 하나에 의지해야 하는 어둡고 습한 공간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당시 예수님을 바로 믿었던 여성들이 끌려와 갇힌 공간입니다.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천주교 성찬에 참여해 빵과 포도주를 먹고 그들의 교리를 인정한다고 한 번만 말하면 감옥생활에서 바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 뒤랑이라는 여성은 19세에 수감돼 38년간 이 감옥에 있으면서 세상의 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감옥 바닥에 불어로 헤지스테(resister)라는 글귀를 써 뒀다고 합니다.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무너졌습니다. 다음세대를 죽이려고 하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세상은 사랑하는 우리 자녀의 삶을 무너트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공격하는데 그들을 지켜줘야 하는 부모가 저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항은 고사하고 백기를 들고 항복한 비참한 패배자처럼 자녀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의 실체를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부모의 욕심과 죄성을 통해 움직이는 마귀의 공격에 자신도 모르게 적극 동참하고 있습니다.부모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열심히 밥 차려주고 뒷바라지 잘 해줘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니도록 해주는 게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기업을 우리에게 맡기신 이유일까요. 아닙니다.‘저항하라!’ 이제는 자녀의 삶을 죽이는 마귀의 도전에 저항하십시오. 더 이상 피투성이가 된 자녀의 영혼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자녀의 삶을 죽이는 마귀의 역사에 저항하는 것이 부모 된 우리의 사명입니다.사랑하는 자녀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에 저항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나의 자녀를 위해 부모가 저항해야 하는 7가지를 제시합니다.첫째, 자녀가 부모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라. 이 시대 많은 자녀가 부모를 무시합니다. 부모에게 대놓고 반말을 하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을 때 부모에게 함부로 행동합니다. 심하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희생을 강요당하고 ‘돈줄’ 그 이상의 존재가 되지 못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자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모를 무시하는 자녀들의 죄악에 저항하지 않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대놓고 함부로 하는데 그런 자녀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싫어 애써 부정하고 포장하려 한다면 이는 자녀가 제멋대로 살도록 방치하고 포기해버린 부모의 잘못입니다.둘째, 자녀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에 대해 저항하라. 이 시대의 10대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릴까 연구하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무엇이 그들의 인생에 독이고 약인지 전혀 분간하지 못한 채 그저 눈앞에 보이는 쾌락과 편안함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잡아줘야 하는 부모가 도리어 잘못된 판단에 동조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납니다.‘이번 한 번만 허락해주지’라며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부모의 무능한 생각이 자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껏 자녀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행위에 대해 저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독려하지는 않았는지 철저하게 뒤돌아봐야 합니다.셋째, 자녀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라. 부모라는 권위 뒤에 숨어 전지전능한 존재인 것처럼 자녀의 인생에 군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자녀를 부정하는 부모들은 자녀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자녀에게 감정적으로 화내고 소리지르는 것을 교육이라 착각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녀들을 깎아내리고 부모인 자신을 높이려 합니다. 자녀를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녀의 존재를 부정합니다.이제는 나도 모르게 뱉었던 자녀를 부정하는 수많은 말과 목숨 걸고 저항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들에게 부정의 생각과 눈빛과 말을 뱉은 만큼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모가 자녀에 대한 부정에 저항하지 않으면 그 부정이 반드시 자녀의 인생을 처참히 무너트림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대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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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제주-부산-서울 찍는 ‘원거리 심방’
      2018년 8월 부산 수영구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부산기도센터에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2014년 여름 한 달 동안 ‘교회 안식월’을 마쳤다. 하나님께선 그때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 당시 나는 부산의 작은 선교회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한 가정이 어느 날 제주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는 덜컥 교인 등록카드를 내고 돌아갔다. 부산에서 제주까지 와서 등록하리라곤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문제는 그분의 사업이 몹시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영적으로 도와야 할 텐데.’ 이제 더 큰 고민이 됐다. 주님께 물으며 지혜를 구했다.“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다.” 그래서 이왕에 한 달에 한 번 가던 부산이니 2주에 한 번씩 가서 어렵게 된 가정과 함께 예배와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일종의 원거리 심방이 매주 모임으로 발전했다.2015년 7월 부산 수영구 오피스텔을 임차해 영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주일과 수·금요일 예배를 대형 TV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엔 방문해서 말씀 양육과 중보기도 시간을 가졌다. 훗날 이 모임을 ‘부산기도센터’라 했다.기도센터 모임은 2018년 전환점을 맞았다. 육지로 갔다가 주일 제주로 돌아오지 못한 성도들이 부산기도센터로 가서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과 청소년들이 부산기도센터를 방문해 예배 교류를 했다. 한 교회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자 수도권으로 진학한 청년들이 이런 요청을 했다. “목사님, 부산에서도 하는데 서울에서는 기도센터 안 하시나요.”사무엘상 7장 15~17절을 보면 사무엘이 라마를 근거지로 벧엘 길갈 미스바를 순회하는 내용이 나온다. 과거 묵상 중에 주님께서 “너의 사역도 이와 같을 거야”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때 나는 “주님, 그렇게 되면 참 힘들겠지만 심심한 날은 없겠네요”라고 말씀드렸다.이 말씀이 갑자기 기억났다. 그래서 겁도 없이 “그럼 서울에서도 모이자”고 답해버렸다. 그렇게 지난해 1월부터 ‘서울기도센터’ 모임도 시작했다. 전도사로 섬겼던 교회 제자 중 한 명이 개척했는데 그 교회를 빌려 매주 화요일 모임을 한다.제주에서 월요일 오전 부산기도센터로 가서 예배 말씀양육 중보기도 심방을 하고 화요일 오후 SRT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센터에서 중보기도와 말씀양육을 한 뒤 수요일 오후 김포공항에서 제주로 돌아온다. 제주 성도들이 이해해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처음에는 몸살이 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러운 목회 패턴이 됐다. 목요일을 쉬는 날로 정했는데, 자연스럽게 금·토요일과 주일로 이어지는 교회사역을 위한 영적·체력적 여유가 생겼다. 화요일부터 시작하는 목회 사이클은 주말이 되면 힘에 부치곤 했다. 하지만 목요일 휴식은 새로운 활력소가 됐다.제주 성도들을 위해 목양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셨는데,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침 출근 시간 전 사업자 심방을 시작했다. 주 3회(월·목·금요일) 아침 시간은 아주 행복한 시간이다. 주일 저녁 시간은 가능하면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한다.제주-부산-서울-제주로 이동하는 시간이 늘었다. 감사하게도 이 시간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시간이 됐다. 비행기와 SRT 지하철 안에서 책도 읽고, 묵상도 하고, 공부도 했다. 하나님은 더 많은 시간과 헌신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쉼을 주시고 더 많은 성도를 섬기게 하셨다.부산기도센터를 시작할 때 일이다. 제주에서 부산행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막 이륙하고 있을 때였다. 주님은 아주 선명하게 내 심령에 말씀하셨다.“비행기는 연료만큼만 날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 나는 법을 배운 독수리는 나는 일이 제일 쉽고 즐거운 일이 된단다.” 매주 주님과 함께 목회에서 나는 법을 연습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 즐거운 일이다.  고웅영 목사(제주새예루살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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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2
  • 예배는 험한 세상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훈련의 자리
        다시 돌아온 예배의 자리. 너무나 감격스럽다. 그러나 잃었던 예배를 다시 찾은 감격에만 젖어 있다면 우리는 진짜 중요한 것을 잃은 것이다. 새롭게 돌아온 예배 자리에서 우리는 예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주일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늘 양식을 맛있게 만들어 먹는 소중한 자리다. 그러나 예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일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훈련의 자리이기도 하다.특별히 다시 찾은 공예배에선 후자(後者)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여기에 합리적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그 짧은 예배 시간 가운데 ‘양식 먹음’과 ‘신앙 훈련’의 기능을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짧은 예배시간이지만 그 안에 사도신경으로 드리는 신앙고백과 축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신앙 훈련 시간이다. 사도신경 속에는 신앙의 풍성한 유산이 담겨 있다.사도신경은 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대로,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거룩한 지식을 내가 믿는 것이며 그 믿음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다. 사도신경을 교회 안, 예배 시간 안, 그리고 입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말고 세상으로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과거와 현재와 미래,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점이 놀랍게도 짧은 사도신경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창조로부터 계획된 미래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의 세상에서 만난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사도신경은 삶에서 함께해야 한다. 주일예배 가운데 신자의 관점 훈련을 하면서 확신 있는 생활까지 훈련하는 것이 사도신경 고백 시간이다.축도는 어떤가. 단순히 예배를 끝내는 공식적 멘트인가. 아니다. 축도는 우리의 신앙을 예배 마지막에 담금질하여 그 뜨거운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파송하는 자리다.필자가 대학부를 지도할 때 이렇게 축도한 적이 있다. 청년들에게 강대상을 바라보지 말고 동서남북 세상의 네 방향을 향하라고 한 뒤에 축도했다. 세상은 저주로 가득 찼다. 절망의 세상이다. 미움의 세상이다. 상처의 세상이다. 마귀의 세상이다.청년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이 축도를 안고 세상에 나가 저주를 끊고 축복으로 바꾸라.”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훈련시키는 축도의 시간이었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동행으로, 짧지만 강하게 성도들을 무장하는 시간이 축도 시간이다. 삼위(三位)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을 이길 세상은 없다.그렇다. ‘양식 먹음’과 함께 ‘신앙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이 예배이고 교회다. 교회가 만약 ‘양식 먹음’에만 집중하면 수동적이고 나약한 신앙인을 만들 것이다. 혹시라도 함께 모여 예배를 못 드리는 상황이 또다시 온다 해도 휘청거리지 말아야 한다. 견고해야 한다.교회는 평소에도 물론이려니와 지금보다 더 극한 상황이 온다 해도 스스로 든든히 서 있도록 철저히 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담대히 이기는 ‘신앙 훈련’이 회복된 예배 가운데, 그리고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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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1
  • 교인 등록카드 파쇄… 한 달간 교회 ‘쉼’
      제주새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지난 1월 제주도 서귀포 안덕면 하멜기념비 앞에서 영광의 문 기도회를 개최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2014년은 제주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기도 시간에 주님께 ‘저 좀 쉬고 싶어요’라고 했다. 여름 한 달 동안 가족과 같이 안식월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주님께선 “왜 너만 쉬니. 교회 일을 너 혼자 했니. 모든 성도가 함께 수고하고 함께 일하지 않았니” 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고 보니 정말 제주새예루살렘교회에서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아내와 교회 리더, 성도들이 자원해서 하는 일이 더 많았다. 회개가 나왔다.교회 전체가 안식월을 갖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안식월 기간을 어떻게 정할지, 어느 정도로 교회 사역을 멈춰야 할지, 그동안 필요한 행정과 재정적인 업무를 어찌할지 등등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무엇보다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한 달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고민도 생겼다. 감사하게도 리더들이 동의해 주었다.7월 둘째 주일이었다. 교회가 무엇인지, 성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강단 위에 종이파쇄기를 가지고 올라갔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진리와 생명의 공동체이며, 또한 교인은 어떤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사실을 나눴습니다. 그래서 8월 한 달을 안식하면서 저와 모든 성도가 함께 이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하고 9월에 다시 모이기를 제안합니다. 한 달 동안 다른 교회들을 섬겨 주시고 그 교회가 여러분에게 좋은 영적 공동체이면 그 교회의 성도로 등록해도 좋습니다. 9월에 다시 이 교회에 오는 이들은 그날을 새로 등록하는 날로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교인 등록카드를 한 장씩 파쇄기에 넣었다. 모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배 후 회의에서 ‘소그룹은 해도 되지 않느냐’ 등 많은 질문이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저도 안식하겠지만, 여러분도 정말 안식하기 바랍니다. 모든 예배, 모든 모임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기도하는 건 자유입니다. 헌금도 한 달 동안 섬기는 교회에 하시길 바랍니다.”그렇게 목회자의 제안에 따라 2014년 여름은 성경학교도, 수련회도, 전도여행도 없는 교회와 예배당이 됐다. 많은 성도가 처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청빙 받아 떠나려 한다는 의구심도 가졌다. 하지만 성도들은 훗날 자신들이 신앙생활에서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한 달을 지내며 예배드린 시간은 처음이었으며 쉼과 회복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우리 가족은 미션홈을 운영하시는 집사님 도움으로 부산 해운대와 동백섬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 달을 지냈다. 처음에는 한 달 동안 많은 책을 읽으며 새로운 목회의 계획을 세워 보리라 생각했지만, 다섯 식구가 함께 모여 먹고 자고 놀고 하는 한 달은 그런 삶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족들과 온전히 안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달이 지나고 다시 모여 예배드리는 날. 한 가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였다. 그 한 가정은 안식월 전 이미 교회를 옮기기로 했던 이들이다. 다시 모인 주일예배는 감격스럽고 기쁘고 행복했다.2012년 미국 풀러신학교의 선교 담당 전체 책임자가 제주에 왔을 때 일이다. 그분은 “지금 목사님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에너지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사역이나 삶, 인생도 하나님께서 허락된 일종의 총량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이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런 고민은 50대 후반 목사님들이 하는데 40대 초반 목사님이 한다니 흥미롭군요.” 나는 지금도 주님이 허락하신 목회와 삶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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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4
  • 감염병의 확산 속에서 되새기는 부활절의 의미
    ▲정재영 교수   질병은 사회적인 현상코로나 19의 여파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정점을 찍은 후에 소강기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집단 감염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전세계적으로는 바이러스가 오히려 더욱 급격하게 퍼지고 있어서 비교적 청정지역이라고 여겨졌던 남미와 아프리카까지도 감염자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올해 상반기 내내 전세계가 전염병에 시달릴 것이고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 예측되는 가운데 일종의 풍토병으로 자리잡아서 올 가을에 그리고 해마다 재발생할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사실 질병은 태고로부터 인류를 위협해 왔고,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을 비롯한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 받고 희생되어 왔다. 이러한 건강과 질병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영향을 받는다. 중세 시대의 주된 질병은 전염병이었는데 14세기에는 흑사병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전염병이 인간을 괴롭혀 왔는데, 의학의 발달로 현대 사회에서 전병병은 거의 근절되고 암이나 심장 질환과 같은 비감염 질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발생 원인조차 불분명한 전염병이 예기치 못하게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질병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체와 질병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통계로 보면, 상류층에 비해 하류층은 출생 시의 몸무게가 더 적게 나가고, 영아 사망률이 높으며, 어른이 된 뒤에도 더 작고, 건강하지 못하고 더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들도 하류층에서 훨씬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생활환경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질병에 시달리더라도 제때 치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결과로 병을 더 키우게 되고 일찍 생을 마치게 된다.사람을 차별하는 전염병 이번 코로나 19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전염병이 계층을 구별해서 감염시키지는 않는다. 돈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려서 걸리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류층의 사람들은 전염병에 매우 취약하다.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마스크나 소독제와 같은 의약품을 구입하기도 쉽지 않고 감염의 위험이 높은 직장 환경을 스스로 개선할 수도 없으며 생계 때문에 그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없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운동을 하거나 건강식품을 사 먹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부자들은 감염을 막기 위해 외출을 자제하고, 감염되면 돈을 들여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만원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일터에 나가면서 자신의 감염 여부조차 알지 못한다.태풍이나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서도 하류층의 사람들은 더 위험한 환경 속에서 살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허리케인이나 지진이 계층을 가려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류층에 비해 하류층의 사람들은 더 안전하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있고 비용을 들여서 대비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외부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막은 사회 약자일수록 더 취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결국 재난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 않게 일어난다.이것은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코로나 19가 유럽과 북미 지역에 큰 피해를 주고 있지만,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로 퍼지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희생을 낳게 될 것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최근 들어 공공 의료 시설을 줄여서 전염병에 제대로 대체하지 못하고 그 결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공공 의료 시설이 아예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제3세계에서는 바이러스의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할 것이기 때문이다.감염병 속에 부활절을 맞이하는 교회의 모습은 이렇게 예기치 못한 감염병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교회 역시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특히 기독교 최고 절기인 부활절을 맞으면서도 기념 예배를 교회당에서 드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 많은 교회들이 당황해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부활절을 연기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부활절 예배를 잘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사망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에 빠진 개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로 부르신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특별히 이 세상의 수많은 약자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보이셨고 사랑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개인만 구원하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창조세계의 회복과 이 땅의 모든 억눌린 자들이 태초에 지음 받은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이다.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마스크 구입이 어렵고 소독제를 구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가 격리를 하는 동안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생활 전선에서 정신없이 일에만 매진하다 보니 감염병에 대한 정보조차 제대로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장애인, 노숙인, 비정규직 노동자, 대리운전 기사, 문화예술인, 아르바이트생, 프리랜서, 돌봄교사, 시간강사 등 재난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해야 한다. 정부와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이번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외국인들은 배제되어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살면서 일을 하고 있지만 외국인들은 주민으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면서 더 큰 위험에 빠져 있다.이들을 위해 교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질병과 치료를 담당하던 주요 기관은 가족과 함께 교회였다. 근대 의학과 병원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통적인 치료법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료했고 중증 환자들은 교회에서 돌보았다. 이번에 유럽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해서 장례식장에서 수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교회 건물에 시신들을 안치한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지킬 뿐만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되새겨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전세계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시기에 부활절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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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4

실시간 칼럼 기사

  •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유기성 선한목자교회 목사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인류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교회도 그 영향을 비켜갈 수 없을 것이기에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모든 것을 아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느낀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한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에스겔 선지자도 고통스러워했습니다.(겔 22:30) 지금 우리의 두려움은 미래 예측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한 사람을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깨달아야 합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게 고통스러운 데는 가시 같은 사람,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반대로 한 사람 때문에 살 희망을 품게도 됩니다. ‘나 한 사람인데’가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살면 나라가 살고 ‘나 한 사람’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코로나19가 한 사람으로부터 수많은 사람에게 퍼져가듯이 한 사람으로 나라가 타락하고 나라가 살 수 있습니다.한경직 손양원 목사, 유관순 열사는 1902년 같은 해에 태어나셨습니다. 세 분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요. 예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 그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이 기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주님의 증인 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찾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빠른 길입니다. “주여, 저를 주님께 드리니 저를 증인으로 삼으소서” 하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우리가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하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책임지라고 하면 절망일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답하셨습니다.(요 6:28~29)하나님의 일이란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하나면 되는데 그것도 못 한다고 하겠습니까.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입니다.예수동행운동을 하면서 주님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상관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가라 하십니다. 화려하고 큰 것에 매이지 말라 하십니다. 작아도 진실하고 순전함을 지키라 하십니다. 적은 수라도 진심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삶을 나누라 하십니다. 그러면 다음은 주님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우리가 ‘나는 죽었다’ ‘나는 예수님으로 산다’ 선언하며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 것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종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코로나19 이후 어떤 변화가 오든지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에 분명히 서서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한국교회와 우리나라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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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자식을 사랑한다면...부모들이여 저항하라!
    홀리씨즈교회 SDC인터내셔널스쿨 학생들이 2017년 5월 서울 총신대 ‘사랑해孝 콘서트’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홀리씨즈교회 제공  프랑스에 콘스탄스(Constance)라는 감옥이 있습니다. 콘스탄스는 ‘의연함, 집요함, 인내, 저항’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감옥은 직경 22m 높이 33m 벽의 두께 6m이며 해자로 둘러 쌓여있습니다. 아주 작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줄기 하나에 의지해야 하는 어둡고 습한 공간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당시 예수님을 바로 믿었던 여성들이 끌려와 갇힌 공간입니다.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천주교 성찬에 참여해 빵과 포도주를 먹고 그들의 교리를 인정한다고 한 번만 말하면 감옥생활에서 바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 뒤랑이라는 여성은 19세에 수감돼 38년간 이 감옥에 있으면서 세상의 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감옥 바닥에 불어로 헤지스테(resister)라는 글귀를 써 뒀다고 합니다.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무너졌습니다. 다음세대를 죽이려고 하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세상은 사랑하는 우리 자녀의 삶을 무너트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공격하는데 그들을 지켜줘야 하는 부모가 저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항은 고사하고 백기를 들고 항복한 비참한 패배자처럼 자녀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의 실체를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부모의 욕심과 죄성을 통해 움직이는 마귀의 공격에 자신도 모르게 적극 동참하고 있습니다.부모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열심히 밥 차려주고 뒷바라지 잘 해줘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니도록 해주는 게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기업을 우리에게 맡기신 이유일까요. 아닙니다.‘저항하라!’ 이제는 자녀의 삶을 죽이는 마귀의 도전에 저항하십시오. 더 이상 피투성이가 된 자녀의 영혼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자녀의 삶을 죽이는 마귀의 역사에 저항하는 것이 부모 된 우리의 사명입니다.사랑하는 자녀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에 저항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나의 자녀를 위해 부모가 저항해야 하는 7가지를 제시합니다.첫째, 자녀가 부모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라. 이 시대 많은 자녀가 부모를 무시합니다. 부모에게 대놓고 반말을 하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을 때 부모에게 함부로 행동합니다. 심하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희생을 강요당하고 ‘돈줄’ 그 이상의 존재가 되지 못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자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모를 무시하는 자녀들의 죄악에 저항하지 않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대놓고 함부로 하는데 그런 자녀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싫어 애써 부정하고 포장하려 한다면 이는 자녀가 제멋대로 살도록 방치하고 포기해버린 부모의 잘못입니다.둘째, 자녀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에 대해 저항하라. 이 시대의 10대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릴까 연구하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무엇이 그들의 인생에 독이고 약인지 전혀 분간하지 못한 채 그저 눈앞에 보이는 쾌락과 편안함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잡아줘야 하는 부모가 도리어 잘못된 판단에 동조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납니다.‘이번 한 번만 허락해주지’라며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부모의 무능한 생각이 자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껏 자녀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행위에 대해 저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독려하지는 않았는지 철저하게 뒤돌아봐야 합니다.셋째, 자녀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라. 부모라는 권위 뒤에 숨어 전지전능한 존재인 것처럼 자녀의 인생에 군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자녀를 부정하는 부모들은 자녀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자녀에게 감정적으로 화내고 소리지르는 것을 교육이라 착각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녀들을 깎아내리고 부모인 자신을 높이려 합니다. 자녀를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녀의 존재를 부정합니다.이제는 나도 모르게 뱉었던 자녀를 부정하는 수많은 말과 목숨 걸고 저항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들에게 부정의 생각과 눈빛과 말을 뱉은 만큼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모가 자녀에 대한 부정에 저항하지 않으면 그 부정이 반드시 자녀의 인생을 처참히 무너트림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대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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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제주-부산-서울 찍는 ‘원거리 심방’
      2018년 8월 부산 수영구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부산기도센터에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2014년 여름 한 달 동안 ‘교회 안식월’을 마쳤다. 하나님께선 그때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 당시 나는 부산의 작은 선교회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한 가정이 어느 날 제주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는 덜컥 교인 등록카드를 내고 돌아갔다. 부산에서 제주까지 와서 등록하리라곤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문제는 그분의 사업이 몹시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영적으로 도와야 할 텐데.’ 이제 더 큰 고민이 됐다. 주님께 물으며 지혜를 구했다.“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다.” 그래서 이왕에 한 달에 한 번 가던 부산이니 2주에 한 번씩 가서 어렵게 된 가정과 함께 예배와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일종의 원거리 심방이 매주 모임으로 발전했다.2015년 7월 부산 수영구 오피스텔을 임차해 영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주일과 수·금요일 예배를 대형 TV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엔 방문해서 말씀 양육과 중보기도 시간을 가졌다. 훗날 이 모임을 ‘부산기도센터’라 했다.기도센터 모임은 2018년 전환점을 맞았다. 육지로 갔다가 주일 제주로 돌아오지 못한 성도들이 부산기도센터로 가서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과 청소년들이 부산기도센터를 방문해 예배 교류를 했다. 한 교회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자 수도권으로 진학한 청년들이 이런 요청을 했다. “목사님, 부산에서도 하는데 서울에서는 기도센터 안 하시나요.”사무엘상 7장 15~17절을 보면 사무엘이 라마를 근거지로 벧엘 길갈 미스바를 순회하는 내용이 나온다. 과거 묵상 중에 주님께서 “너의 사역도 이와 같을 거야”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때 나는 “주님, 그렇게 되면 참 힘들겠지만 심심한 날은 없겠네요”라고 말씀드렸다.이 말씀이 갑자기 기억났다. 그래서 겁도 없이 “그럼 서울에서도 모이자”고 답해버렸다. 그렇게 지난해 1월부터 ‘서울기도센터’ 모임도 시작했다. 전도사로 섬겼던 교회 제자 중 한 명이 개척했는데 그 교회를 빌려 매주 화요일 모임을 한다.제주에서 월요일 오전 부산기도센터로 가서 예배 말씀양육 중보기도 심방을 하고 화요일 오후 SRT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센터에서 중보기도와 말씀양육을 한 뒤 수요일 오후 김포공항에서 제주로 돌아온다. 제주 성도들이 이해해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처음에는 몸살이 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러운 목회 패턴이 됐다. 목요일을 쉬는 날로 정했는데, 자연스럽게 금·토요일과 주일로 이어지는 교회사역을 위한 영적·체력적 여유가 생겼다. 화요일부터 시작하는 목회 사이클은 주말이 되면 힘에 부치곤 했다. 하지만 목요일 휴식은 새로운 활력소가 됐다.제주 성도들을 위해 목양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셨는데,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침 출근 시간 전 사업자 심방을 시작했다. 주 3회(월·목·금요일) 아침 시간은 아주 행복한 시간이다. 주일 저녁 시간은 가능하면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한다.제주-부산-서울-제주로 이동하는 시간이 늘었다. 감사하게도 이 시간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시간이 됐다. 비행기와 SRT 지하철 안에서 책도 읽고, 묵상도 하고, 공부도 했다. 하나님은 더 많은 시간과 헌신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쉼을 주시고 더 많은 성도를 섬기게 하셨다.부산기도센터를 시작할 때 일이다. 제주에서 부산행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막 이륙하고 있을 때였다. 주님은 아주 선명하게 내 심령에 말씀하셨다.“비행기는 연료만큼만 날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 나는 법을 배운 독수리는 나는 일이 제일 쉽고 즐거운 일이 된단다.” 매주 주님과 함께 목회에서 나는 법을 연습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 즐거운 일이다.  고웅영 목사(제주새예루살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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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2
  • 예배는 험한 세상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훈련의 자리
        다시 돌아온 예배의 자리. 너무나 감격스럽다. 그러나 잃었던 예배를 다시 찾은 감격에만 젖어 있다면 우리는 진짜 중요한 것을 잃은 것이다. 새롭게 돌아온 예배 자리에서 우리는 예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주일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늘 양식을 맛있게 만들어 먹는 소중한 자리다. 그러나 예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일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훈련의 자리이기도 하다.특별히 다시 찾은 공예배에선 후자(後者)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여기에 합리적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그 짧은 예배 시간 가운데 ‘양식 먹음’과 ‘신앙 훈련’의 기능을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짧은 예배시간이지만 그 안에 사도신경으로 드리는 신앙고백과 축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신앙 훈련 시간이다. 사도신경 속에는 신앙의 풍성한 유산이 담겨 있다.사도신경은 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대로,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거룩한 지식을 내가 믿는 것이며 그 믿음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다. 사도신경을 교회 안, 예배 시간 안, 그리고 입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말고 세상으로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과거와 현재와 미래,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점이 놀랍게도 짧은 사도신경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창조로부터 계획된 미래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의 세상에서 만난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사도신경은 삶에서 함께해야 한다. 주일예배 가운데 신자의 관점 훈련을 하면서 확신 있는 생활까지 훈련하는 것이 사도신경 고백 시간이다.축도는 어떤가. 단순히 예배를 끝내는 공식적 멘트인가. 아니다. 축도는 우리의 신앙을 예배 마지막에 담금질하여 그 뜨거운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파송하는 자리다.필자가 대학부를 지도할 때 이렇게 축도한 적이 있다. 청년들에게 강대상을 바라보지 말고 동서남북 세상의 네 방향을 향하라고 한 뒤에 축도했다. 세상은 저주로 가득 찼다. 절망의 세상이다. 미움의 세상이다. 상처의 세상이다. 마귀의 세상이다.청년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이 축도를 안고 세상에 나가 저주를 끊고 축복으로 바꾸라.”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훈련시키는 축도의 시간이었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동행으로, 짧지만 강하게 성도들을 무장하는 시간이 축도 시간이다. 삼위(三位)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을 이길 세상은 없다.그렇다. ‘양식 먹음’과 함께 ‘신앙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이 예배이고 교회다. 교회가 만약 ‘양식 먹음’에만 집중하면 수동적이고 나약한 신앙인을 만들 것이다. 혹시라도 함께 모여 예배를 못 드리는 상황이 또다시 온다 해도 휘청거리지 말아야 한다. 견고해야 한다.교회는 평소에도 물론이려니와 지금보다 더 극한 상황이 온다 해도 스스로 든든히 서 있도록 철저히 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담대히 이기는 ‘신앙 훈련’이 회복된 예배 가운데, 그리고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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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1
  • 교인 등록카드 파쇄… 한 달간 교회 ‘쉼’
      제주새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지난 1월 제주도 서귀포 안덕면 하멜기념비 앞에서 영광의 문 기도회를 개최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2014년은 제주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기도 시간에 주님께 ‘저 좀 쉬고 싶어요’라고 했다. 여름 한 달 동안 가족과 같이 안식월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주님께선 “왜 너만 쉬니. 교회 일을 너 혼자 했니. 모든 성도가 함께 수고하고 함께 일하지 않았니” 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고 보니 정말 제주새예루살렘교회에서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아내와 교회 리더, 성도들이 자원해서 하는 일이 더 많았다. 회개가 나왔다.교회 전체가 안식월을 갖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안식월 기간을 어떻게 정할지, 어느 정도로 교회 사역을 멈춰야 할지, 그동안 필요한 행정과 재정적인 업무를 어찌할지 등등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무엇보다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한 달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고민도 생겼다. 감사하게도 리더들이 동의해 주었다.7월 둘째 주일이었다. 교회가 무엇인지, 성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강단 위에 종이파쇄기를 가지고 올라갔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진리와 생명의 공동체이며, 또한 교인은 어떤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사실을 나눴습니다. 그래서 8월 한 달을 안식하면서 저와 모든 성도가 함께 이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하고 9월에 다시 모이기를 제안합니다. 한 달 동안 다른 교회들을 섬겨 주시고 그 교회가 여러분에게 좋은 영적 공동체이면 그 교회의 성도로 등록해도 좋습니다. 9월에 다시 이 교회에 오는 이들은 그날을 새로 등록하는 날로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교인 등록카드를 한 장씩 파쇄기에 넣었다. 모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배 후 회의에서 ‘소그룹은 해도 되지 않느냐’ 등 많은 질문이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저도 안식하겠지만, 여러분도 정말 안식하기 바랍니다. 모든 예배, 모든 모임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기도하는 건 자유입니다. 헌금도 한 달 동안 섬기는 교회에 하시길 바랍니다.”그렇게 목회자의 제안에 따라 2014년 여름은 성경학교도, 수련회도, 전도여행도 없는 교회와 예배당이 됐다. 많은 성도가 처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청빙 받아 떠나려 한다는 의구심도 가졌다. 하지만 성도들은 훗날 자신들이 신앙생활에서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한 달을 지내며 예배드린 시간은 처음이었으며 쉼과 회복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우리 가족은 미션홈을 운영하시는 집사님 도움으로 부산 해운대와 동백섬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 달을 지냈다. 처음에는 한 달 동안 많은 책을 읽으며 새로운 목회의 계획을 세워 보리라 생각했지만, 다섯 식구가 함께 모여 먹고 자고 놀고 하는 한 달은 그런 삶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족들과 온전히 안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달이 지나고 다시 모여 예배드리는 날. 한 가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였다. 그 한 가정은 안식월 전 이미 교회를 옮기기로 했던 이들이다. 다시 모인 주일예배는 감격스럽고 기쁘고 행복했다.2012년 미국 풀러신학교의 선교 담당 전체 책임자가 제주에 왔을 때 일이다. 그분은 “지금 목사님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에너지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사역이나 삶, 인생도 하나님께서 허락된 일종의 총량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이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런 고민은 50대 후반 목사님들이 하는데 40대 초반 목사님이 한다니 흥미롭군요.” 나는 지금도 주님이 허락하신 목회와 삶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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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4
  • 감염병의 확산 속에서 되새기는 부활절의 의미
    ▲정재영 교수   질병은 사회적인 현상코로나 19의 여파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정점을 찍은 후에 소강기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집단 감염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전세계적으로는 바이러스가 오히려 더욱 급격하게 퍼지고 있어서 비교적 청정지역이라고 여겨졌던 남미와 아프리카까지도 감염자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올해 상반기 내내 전세계가 전염병에 시달릴 것이고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 예측되는 가운데 일종의 풍토병으로 자리잡아서 올 가을에 그리고 해마다 재발생할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사실 질병은 태고로부터 인류를 위협해 왔고,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을 비롯한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 받고 희생되어 왔다. 이러한 건강과 질병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영향을 받는다. 중세 시대의 주된 질병은 전염병이었는데 14세기에는 흑사병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전염병이 인간을 괴롭혀 왔는데, 의학의 발달로 현대 사회에서 전병병은 거의 근절되고 암이나 심장 질환과 같은 비감염 질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발생 원인조차 불분명한 전염병이 예기치 못하게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질병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체와 질병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통계로 보면, 상류층에 비해 하류층은 출생 시의 몸무게가 더 적게 나가고, 영아 사망률이 높으며, 어른이 된 뒤에도 더 작고, 건강하지 못하고 더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들도 하류층에서 훨씬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생활환경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질병에 시달리더라도 제때 치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결과로 병을 더 키우게 되고 일찍 생을 마치게 된다.사람을 차별하는 전염병 이번 코로나 19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전염병이 계층을 구별해서 감염시키지는 않는다. 돈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려서 걸리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류층의 사람들은 전염병에 매우 취약하다.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마스크나 소독제와 같은 의약품을 구입하기도 쉽지 않고 감염의 위험이 높은 직장 환경을 스스로 개선할 수도 없으며 생계 때문에 그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없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운동을 하거나 건강식품을 사 먹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부자들은 감염을 막기 위해 외출을 자제하고, 감염되면 돈을 들여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만원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일터에 나가면서 자신의 감염 여부조차 알지 못한다.태풍이나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서도 하류층의 사람들은 더 위험한 환경 속에서 살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허리케인이나 지진이 계층을 가려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류층에 비해 하류층의 사람들은 더 안전하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있고 비용을 들여서 대비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외부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막은 사회 약자일수록 더 취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결국 재난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 않게 일어난다.이것은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코로나 19가 유럽과 북미 지역에 큰 피해를 주고 있지만,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로 퍼지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희생을 낳게 될 것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최근 들어 공공 의료 시설을 줄여서 전염병에 제대로 대체하지 못하고 그 결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공공 의료 시설이 아예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제3세계에서는 바이러스의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할 것이기 때문이다.감염병 속에 부활절을 맞이하는 교회의 모습은 이렇게 예기치 못한 감염병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교회 역시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특히 기독교 최고 절기인 부활절을 맞으면서도 기념 예배를 교회당에서 드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 많은 교회들이 당황해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부활절을 연기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부활절 예배를 잘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사망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에 빠진 개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로 부르신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특별히 이 세상의 수많은 약자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보이셨고 사랑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개인만 구원하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창조세계의 회복과 이 땅의 모든 억눌린 자들이 태초에 지음 받은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이다.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마스크 구입이 어렵고 소독제를 구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가 격리를 하는 동안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생활 전선에서 정신없이 일에만 매진하다 보니 감염병에 대한 정보조차 제대로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장애인, 노숙인, 비정규직 노동자, 대리운전 기사, 문화예술인, 아르바이트생, 프리랜서, 돌봄교사, 시간강사 등 재난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해야 한다. 정부와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이번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외국인들은 배제되어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살면서 일을 하고 있지만 외국인들은 주민으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면서 더 큰 위험에 빠져 있다.이들을 위해 교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질병과 치료를 담당하던 주요 기관은 가족과 함께 교회였다. 근대 의학과 병원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통적인 치료법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료했고 중증 환자들은 교회에서 돌보았다. 이번에 유럽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해서 장례식장에서 수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교회 건물에 시신들을 안치한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지킬 뿐만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되새겨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전세계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시기에 부활절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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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4
  • ‘종말의 때’ 오직 하나님만 알아… 정확히 안다고 하는 사람은 짝퉁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바티칸 궁전 시스티나 성당에 1534년부터 7년 동안 그린 ‘최후의 심판’.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천년왕국과 마지막 때에 관한 놀라운 기록이 남아 있다. 1000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건 무의미하다.1000이란 숫자는 유대문화에서 축복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을 ‘천 배의 축복’(신 1:11)과 ‘천대의 은혜’(신 5:10)로 표현했다. 베드로는 주의 날을 준비하라 권하면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했다. 성경의 1000년은 문자적 1000년이 아니다. 하나님 이외의 누구도 정확한 기간, 시점의 길이와 양을 알 수 없다.이런 배경 지식으로 사도 요한이 봤던 요한계시록 20장의 환상을 다시 보자.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옛 뱀이요 마귀이자 사탄인 용을 잡아 1000년 동안 결박해 무저갱에 던져 넣는다. 이는 1000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계 20:1~3)요한계시록 12장에 등장한 천사장 미가엘과의 영적 전쟁에 패해 하늘로부터 내쫓긴 옛 뱀이요 마귀, 사탄인 큰 용이 1000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진 것이다. 이 사건이 이미 예수의 초림 시 일어난 사건인지, 아니면 재림 시 일어날 사건인지 복음주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다양하다.개인적으로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사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역으로 주님 앞에 철저히 굴복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 가운데 남아있다. 주님 재림 때 완전히 굴복할 것이다.결국 ‘이미’와 ‘아직’의 긴장 사이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선취됐지만, 아직 우리 역사 속에서 성취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이미 승리한 천상교회와 아직 전투 중인 지상교회 이야기가 함께 전개된다.천년왕국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1000년 동안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 20:4)천년왕국도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신실한 성도들은 이 땅에서부터 왕 노릇 하고 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라.”(계 5:9~10)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천상과 지상교회에서 이미 시작됐다. 다만 우리 역사 속에서 아직 그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으나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복음 전파를 위해 순교한 영혼과 짐승이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 1000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것이다.천년왕국에 대해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 다양한 신학적 주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관점에서 천년왕국을 해석할 경우 모든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이 재림 주인 자신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신천지 집단의 실상이다. 이들은 신천지가 세워진 1984년 3월 14일 천년왕국이 시작됐다고 본다. 신천지가 인정해야만 천년왕국에 들어갈 자격도 얻는다고 말한다. 허무맹랑하다.종말도 이미 실현된 종말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로 나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은 악인에게는 재앙과 심판, 두려움의 사건이다. 반대로 신실한 지상교회 성도들에게는 새 창조의 역사로 구원과 회복, 기쁨과 환희를 상징하는 축복의 사건이다.우리는 매 순간 삶 속에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맞이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제 마지막 시간을 허락하실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날이 온다는 점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개인적 종말이라 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개인의 차원을 넘어 역사 전체가 마지막 때를 맞이하는 역사적 종말도 있다. 역사적 종말의 때 역시 오직 하나님만 알 수 있다. 주님은 마태복음 24장 36절에서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다. 그 날과 시를 정확히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짝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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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 선교사가 겪는 코로나19 위기
      ▲정용구 선교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에는 중국 내 확진자가 전 세계 뉴스로 보도되면서, 한인 선교사들의 경우 선교지에서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확진자가 급진적으로 증가하자, 선교지에서 한국에 대한 혐오도 늘었다. '코리아'와 '코로나'라는 비슷한 발음으로 놀림을 받았다는 지역도 있었다. 선교사들의 사역도 신천지처럼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들의 입국 금지를 하는 나라들이 늘어났다. 이때만 해도 많은 선교사는 한국에서 예배당 출입을 폐쇄하고, 예배를 중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그런데 코로나19의 확진자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 지역에서 한국보다 더 많은 확진자가 나오고, 중동과 미국에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확진자로 전 세계가 국경을 폐쇄하게 됐다. 또 항공 및 모든 출입국을 막는 조치를 강행하면서 선교사들은 몸으로 이 위기를 체감하게 됐다. 인도는 자국 내 거주 한국인의 모든 비자를 무효화했다.  그런 가운데 선교 현지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코로나19 확진자의 증가로 외국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자국으로 철수하라는 행정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급박하게 나오려고 했으나 공항 폐쇄로 인해 구입한 항공권도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수 없이 항공권 변경을 위한 연락을 해도 항공사나 여행사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구입했던 항공권의 환불은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곧바로 운항이 가능한 항공권을 구입하자니 가격이 너무 비싸다. 혹 구입을 하더라도 공항폐쇄나 이동 제한 명령에 발이 묶이면, 항공권으로 인한 손실이 불가피해져 항공권 구입을 고민하는 연락이 많았다.  방송 등 언론보도에 의하면 우리 정부에서 국적기나, 전세 항공기를 보내면 뭔가 지원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몇몇 선교지의 한인회나 대사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이 경우도 자기 부담금이 원칙이며, 그 비용이 일반 항공요금보다 꽤 비싸다고 한다. 늘 저가 항공기를 이용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여러 번 경유하는 항공편을 애용하는 선교사들의 형편으로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특히 한국의 많은 후원교회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대신 인터넷이나 가정예배를 드리다 보니, 헌금을 드리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에게 선교비 송금을 임시 중단한 교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선교지에서 이동도 못 하고, 선교비 지원이 끊어진 상황에서 버텨야 하는  선교사들의 어려움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특히 한국의 분위기도 초기와 달리 해외에서 유입되는 확진자의 증가로 인해 귀국했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도 느껴진다고 한다. 특히 선교사들의 경우 스스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자가 격리를 하려고 해도 부족한 안식관 시설과, 일반 시민들의 생활 터전 중심에 자리 잡은 안식관에서는 외국에서 온 선교사를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  지금 코로나19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건물주는 임대료를 줄이고, 지방 자치단체는 자금 지원에 나서고 있다. 또 몇몇 대형교회들로부터 작은 교회의 임대료 지원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현실에서 선교 현지에서 몸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선교사들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도울지를 같이 고민하고, 이 위기를 같이 이겨 나갈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가장 절실하게 어려움을 겪는 안식관과, 선교사들의 항공권 비용을 위한 지혜와 동역의 손길이 선교사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에는 중국 내 확진자가 전 세계 뉴스로 보도되면서, 한인 선교사들의 경우 선교지에서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확진자가 급진적으로 증가하자, 선교지에서 한국에 대한 혐오도 늘었다. '코리아'와 '코로나'라는 비슷한 발음으로 놀림을 받았다는 지역도 있었다. 선교사들의 사역도 신천지처럼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들의 입국 금지를 하는 나라들이 늘어났다. 이때만 해도 많은 선교사는 한국에서 예배당 출입을 폐쇄하고, 예배를 중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그런데 코로나19의 확진자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 지역에서 한국보다 더 많은 확진자가 나오고, 중동과 미국에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확진자로 전 세계가 국경을 폐쇄하게 됐다. 또 항공 및 모든 출입국을 막는 조치를 강행하면서 선교사들은 몸으로 이 위기를 체감하게 됐다. 인도는 자국 내 거주 한국인의 모든 비자를 무효화했다.  그런 가운데 선교 현지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코로나19 확진자의 증가로 외국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자국으로 철수하라는 행정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급박하게 나오려고 했으나 공항 폐쇄로 인해 구입한 항공권도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수 없이 항공권 변경을 위한 연락을 해도 항공사나 여행사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구입했던 항공권의 환불은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곧바로 운항이 가능한 항공권을 구입하자니 가격이 너무 비싸다. 혹 구입을 하더라도 공항폐쇄나 이동 제한 명령에 발이 묶이면, 항공권으로 인한 손실이 불가피해져 항공권 구입을 고민하는 연락이 많았다.  방송 등 언론보도에 의하면 우리 정부에서 국적기나, 전세 항공기를 보내면 뭔가 지원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몇몇 선교지의 한인회나 대사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이 경우도 자기 부담금이 원칙이며, 그 비용이 일반 항공요금보다 꽤 비싸다고 한다. 늘 저가 항공기를 이용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여러 번 경유하는 항공편을 애용하는 선교사들의 형편으로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특히 한국의 많은 후원교회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대신 인터넷이나 가정예배를 드리다 보니, 헌금을 드리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에게 선교비 송금을 임시 중단한 교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선교지에서 이동도 못 하고, 선교비 지원이 끊어진 상황에서 버텨야 하는  선교사들의 어려움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특히 한국의 분위기도 초기와 달리 해외에서 유입되는 확진자의 증가로 인해 귀국했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도 느껴진다고 한다. 특히 선교사들의 경우 스스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자가 격리를 하려고 해도 부족한 안식관 시설과, 일반 시민들의 생활 터전 중심에 자리 잡은 안식관에서는 외국에서 온 선교사를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  지금 코로나19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건물주는 임대료를 줄이고, 지방 자치단체는 자금 지원에 나서고 있다. 또 몇몇 대형교회들로부터 작은 교회의 임대료 지원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현실에서 선교 현지에서 몸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선교사들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도울지를 같이 고민하고, 이 위기를 같이 이겨 나갈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가장 절실하게 어려움을 겪는 안식관과, 선교사들의 항공권 비용을 위한 지혜와 동역의 손길이 선교사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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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 코로나가 가져다준 선물
      송길원 목사(청란교회·하이패밀리 대표)   나는 배웠다. 모든 시간은 정지됐다. 일상이 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만나도 경계부터 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마주 앉아 팥빙수를 겁 없이 떠먹던 날이 그립다. 가슴을 끌어안고 우정을 나누던 날이 또다시 올 수 있을까. 비로소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한다. 속히 일상의 기적과 함께 기적의 주인공으로 사는 일상을 달라고.나는 배웠다. 마스크를 써 본 뒤에야 지난날 내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고 침묵을 배웠다. 너무나 쉽게 말했다. 너무 쉽게 비판하고 너무 쉽게 조언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경박했다. 나는 배웠다. ‘살아있는 침묵’을 스스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몰락을 통해서만 ‘죽음으로 침묵’하게 된다는 사실을.나는 배웠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성직자도 아니었다. 소식을 듣자 대구로 달려간 신혼 1년 차 간호(천)사가 가슴을 울렸다. 잠들 곳이 없어 장례식장에서 잠든다는 겁 없는 간호(천)사들의 이야기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따뜻한 더치커피를 캔에 담아 전달하는 손길들을 보며 살맛 나는 세상을 느꼈다. 이마에 깊이 팬 고글 자국 위에 밴드를 붙이며 싱긋 웃는 웃음이 희망 백신이었다.나는 배웠다. 죽음이 영원히 3인칭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언젠가 내게도 닥칠 수 있는, 그래서 언제나 준비돼 있어야만 하는 것이 죽음인 것을 배웠다. 인간이 쌓은 1000만의 도성도 바벨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미생물의 침투에 너무도 쉽게 쓰러질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배웠다. 그런데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악다구니를 퍼붓고 살았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를 배웠다.나는 배웠다. 인생의 허들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는 것임을.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재정의하고 살아남아 영웅이 될지, 바이러스의 희생양이 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닥친 불행과 시련을 운명이 아닌 삶의 한 조각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때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었다.나는 배웠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북아프리카의 항구 오랑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최대 피해 지역인 대구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었다. 침착함과 고요함이 버티고 있었다.’(미국 ABC 방송 이언 기자) 일본 대지진 때 일어났던 사재기도 없었다. 오히려 ‘착한 건물주 운동’으로 서로를 감싸 안았다. 외출 자제로 인간 방파제가 돼 대한민국을 지켰다. ‘배려와 존중’으로 빛났다.나는 배웠다. 어떤 기생충보다 무섭고 무서운 기생충은 ‘대충’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대충이었다. 손 씻기도 대충, 사회적 거리 유지도 대충, 생각도 대충…. 이제는 나 스스로 면역주치의가 돼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환경 문제나 생태계의 파괴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다시 찾아올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환경 지킴이가 돼야 한다. 나는 확실히 배웠다. 공생과 공존이 상생(相生)의 길이라는 것을.나는 배웠다. 가장 큰 바이러스는 사스도 코로나도 아닌 내 마음을 늙고 병들게 하는 절망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나는 배워야 한다. 아파도 웃어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게 진정한 인간 승리임을. 나는 기도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는 이탈리어다. 세기의 천재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비롯해 수많은 명작을 남긴다. 많은 세월이 흐른다. 인생의 황혼 녘인 87세 때 자신의 스케치북 한쪽에 남긴 글이다. 내 나이 60을 넘겼다. 그래,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잘 살기 위해 배워야 한다.“안코라 임파로!”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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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31
  • 내 백성을 구별하리라
    ▲이정기 목사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될 때, 제일 먼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전세기를 띄워 대피시킨 나라가 미국이다. 그리고 연이어 프랑스, 호주, 영국, 일본, 한국이 전세기를 띄워 대피시켰다. 자기 나라 백성이기에 보호한 것이다. 그리고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나라들이 중국인 입국을 금지시켰다. 북한, 대만, 베트남, 필리핀, 인도, 러시아, 몽골, 말레이시아, 싱가폴, 미국, 홍콩, 호주, 이스라엘, 뉴질랜드, 많은 나라들이 중국인 입국을 금지시켰다.일찍이 중국인 입국을 금지시킨 대만이나 러시아 베트남 같은 나라들은 확산이 더딘 반면에,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후베이성에 한해서 금지한 나라는 확진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래서 이제는 세계 180개 국가가 한국발 여행객의 입국을 금지시키는 상황이 되다. 그래서 인천 공항이 텅텅 비어있다. 박항서 감독으로 인해서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베트남 마저도 한국사람들을 피하고 있다. 호텔에서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방을 주지 않고 있다. 유럽도 안일하게 대처하더니 지금은 중국보다 확진자가 더 많아졌다. 이제는 유럽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애써야 할 상황이다. 끝까지 힘써야 한다. 대한민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라들도 자기 백성들을 구별한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구별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실 때 애굽의 바로왕이 순순히 보내주지 않자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다. 모세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피로변한다. 지팡이를 잡은 손을 운하와 못위에 펴니 개구리들이 올라와 애굽땅을 덮는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재앙인 피와 개구리 재앙은 애굽의 술객들도 따라한다. 그러나 세 번째 재앙은 사전 경고도 없었고, 애굽의 술객들도 따라하지 못한다.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니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른다. 그때서야 애굽의 술객들이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출8:19> 고 고한다.  그런데 네 번째 재앙부터는 양상이 달라진다. 애굽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셔서 애굽 땅에만 재앙을 내리신다. 출 8:20-23절을 보면 '내 백성'이라는 표현이 4번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애굽땅에 파리떼가 가득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땅은 구별하여 파리가 없게 할 것이다.' 내 백성을 특별하게 구별하겠다고 말씀하신다.구별하신 이유는 단순하다. '내 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다. 사 4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것이라고 소유 삼아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물가운데 지날때에 물이 침몰치 못하도록, 불가운데 지날때에 불이 사르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고,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셨다. 다섯 번째 재앙인 가축들이 전염병으로 죽는 재앙에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다.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출9:6절>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이 애굽의 모든 사람과 짐승과 밭에 있는 모든 채소 그리고 모든 나무를 꺾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다.<출9:25-26절> 아홉 번째 흑암 재앙이 애굽 온 땅을 덮어 사람들이 3일동안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다.<출10:22-23절> 마지막 열 번째 재앙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다. 처음 난 짐승들까지 다 죽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개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출11:5-7절>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구별하셨다. 그래서 애굽땅에 재앙이 있을때 고센땅에는 없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구별해주시는 것이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구별해주시는 것이 축복이다.  구별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출애굽기 20장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될 것을 구별시켜 주셨다. 취할것과 취해서는 안될 것을 구별시켜주셨다.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구별시켜주셨다. 날도 구별시켜주셨다. 사람도 구별시켜주셨다. 장소도 구별시켜주셨다. 언어도 구별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것도 구별시켜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십일조이다. 아무리 바빠도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주일성수와 기도생활이다. 아무리 힘든 문제가 있어도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찬송과 감사이다. 이것이 구별된 삶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다.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씀이 많이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 등 많이 있는데 가장 많이 쓰여지는 말씀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성도'는 '거룩한 무리, 거룩한 백성'이란 뜻이다. 이 "거룩"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코데쉬", 헬라어로 "하기오쉬네"라고 하는데 "구별되다"란 뜻이 있다. 그러므로 구별되게 사는 것이 거룩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구별하신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신다. 예배드리는 자와 예배 드리지 않는 자, 순종하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 기도하는 자와 기도하지 않는자, 충성하는 자와 게으른 자, 양과 염소를 구별하신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신다.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구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특별히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건져주시고, 응답하시고, 축복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구별되게 살자. 그래서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많이 받으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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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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