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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은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 제3·제4의 성은 없어
        독일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에덴동산’(1530년). 하나님은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남녀 이외의  제3, 제4, 제5의 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녀 성별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창조질서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행위다.  동성 간의 성애가 세속도시인 소돔과 고모라에 불의 심판이 내리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이스라엘 공동체를 참혹한 내전에 휩싸이게 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동성 간의 성애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삶의 질서를 정면으로 저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며, 둘째, 하나님이 주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적 규범을 고의로 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첫 번째 항목에 대해 살펴본다. 하나님은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 남자와 여자 이외에 제3, 제4, 제5의 성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각기 부모를 떠나 합하여 한 몸을 이룰 것을 명령하셨다.(창 2:24) ‘한 몸이 되라’는 것은 두 신체가 붙어서 자웅동체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이 사랑 안에서 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인 성관계를 가지라는 뜻이다.성관계는 첫째로, 전인적인 인격적 사랑의 지평 안에서 가져야 한다. 둘째,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이 관계가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결혼이다. 이 질서는 아담과 하와 시대부터 재림 시까지 모든 인류가 준수해야 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질서다. 바울은 로마서 1장 26~27절에서 이와 같은 창세기의 질서를 순리라고 말했다. 이 질서에 반해 동성 간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역리라고 말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본문이 말하는 동성 간의 성관계는 당시 이방 신전에서 종교의례의 일부로서 행하던 신전 미동과의 성관계를 가리키는 것일 뿐, 일반적인 의미의 동성 간 성관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그러나 이 해석은 로마서 1장의 문맥에서는 불가능한 해석이다. 바울은 1장 16~17절에서 ‘모든 인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보편적인 복음의 원리를 천명한다. 왜 모든 인류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이다.바울은 계속되는 1장 18~32절에선 이방인 전체의 보편적인 죄의 상태를 말하고 2장 1절에서 3장 18절까지에선 유대인 전체의 보편적인 죄의 상태를 말한다. 바울은 모든 이방인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죄들 가운데 대표적인 종교적인 죄 하나와 윤리적인 죄 하나를 제시한다. 종교적인 죄는 우상숭배(롬 1:21~23,25)이고 윤리적인 죄는 동성애(롬 1:24,26~27)다.본문이 말하는 역리는 이방 사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동성 간의 성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문맥상 이 자리에는 특정한 종교의식 가운데 작은 일부 과정인 신전 동성애가 들어갈 수 없다.특히 동성 간의 성관계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보편적인 질서에 저항하는 독신적인(blasphemous) 행위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성별은 하나님이 정해 주시는 것이며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은 인간의 성별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한번 결정된 성별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변경할 수 없다는 뜻이다.성별의 자기결정권은 없으며 성전환도 불가능하다. 성전환 수술은 말은 멋있지만, 실제론 성불구화 수술이다. 남성이 성전환수술을 받으면 남성성기가 여성성기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기가 제거되는 것으로 끝난다. 여성이 성전환 수술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둘째, 하나님은 동성을 향해 성적인 욕구를 갖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동성을 향한 성적인 욕구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한때 동성애가 유전자, 뇌 구조, 호르몬 등에 의해 유발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으나 모든 연구결과가 표본조사의 편향성, 수치 조작, 왜곡된 판독 등으로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다. 2019년 48만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동성을 향한 성적 욕구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동성을 향한 성적인 욕구는 후천적으로,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는 말은 충분히 교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동성 간의 성관계를 가지는 자들을 향해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라고 말하고 있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동성 간의 성관계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증거라는 뜻이다.하나님이 정해 주신 질서를 벗어난 삶이 영적·도덕적·보건·의료적으로 건강하고 바른 삶이 될 수 없다. 영적인 황폐화와 정신적인 불안, 도덕적 감각과 의식의 마비, 따뜻한 사랑의 원천인 가족들로부터의 소외는 무엇을 뜻할까. 에이즈 감염,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이 만나는 항문성교에 뒤따르는 각종 성병과 장 관련 질환, 장기감염, 성전환 수술에 뒤따르는 성불구화 등은 동성 간의 성관계를 하나님이 외면하셨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상원 교수<총신대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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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3
  • 위트로 재해석한 교회 용어 두 달 만에 4600명 구독 중
      차성진 목사가 최근 경기도 양주의 한 카페에서 ‘짓궂은 교회사전’을 만든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할렐루야(Hallelujah): [의문사] 설교자가 사용하는 경우에 한해 뜻이 다양해지는 말. 듣고 있지? 내 말 맞지? 지금 조냐?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페이스북 페이지 ‘짓궂은 교회사전’이 정의 내린 13번째 단어다. 원래 뜻과는 다르지만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짓궂은 교회사전은 교회 안팎에서 쓰는 단어를 재해석해 정사각형 이미지 한 장에 담아 매일 업로드한다. 해학과 풍자의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게 특징이다. 이렇게 정의된 단어만 70개 정도다.반응은 뜨겁다. 팔로어들은 “유의어로는 ‘믿으시면 아멘’이 있다” “나도 모르게 따라해 봤다” 등의 댓글을 줄줄이 달았다. 지난 5월 페이지 운영을 시작했지만 4600명 넘는 기독교인이 구독 중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등 문학작품을 기독교적 시각으로 각색하기도 한다. 메일과 페이스북 메시지로 아이디어 제보가 쏟아져 자체 공모전도 열고 있다.독특한 사전의 집필자 차성진(29) 목사를 경기도 양주의 한 카페에서 최근 만났다. 백석대와 백석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차 목사는 현재 공군 부대 군종목사로 복무하고 있다. 군복 차림으로 나타난 차 목사는 “짓궂음은 제 성격을 정의하는 키워드다. 목사가 짓궂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냐”며 반문했다.차 목사는 집 청소 도중 발견한 ‘이외수의 감성 사전’을 보고 사전 형식의 카드뉴스를 생각해 냈다고 한다. 그는 “단어의 뜻을 비틀어 교회를 바라보면 공감과 재미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목회자로서의 신앙관까지 녹이니 ‘내가 만드는 교회사전’이 됐다”고 말했다.아이템 발굴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사전을 집필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모든 것이 재미있어 보인다”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운전하다가 성경을 읽다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으면 생각이 끊임없이 튀어나온다고 했다. 그는 “아직 수첩에 쌓아둔 아이템이 100개 정도 있다”며 “사전 만드는 일은 부담 없는 즐거운 일상”이라고 소개했다.신앙을 짓궂게 표현해 무엇을 얻고 싶을까. 차 목사는 ‘십자가의 회복’을 꼽았다. 그는 “사람들은 삶의 의미 같은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 종교를 가진다”고 진단했다. 이어 “교회가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복음 속에 숨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은 뉴미디어 콘텐츠라고 다르지 않다”며 “개혁교회의 표준 교리책이라 할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처럼 믿음의 선배들이 이미 가졌던 고민의 결론을 다양한 방법으로 전하기 위해선 풍자와 해학 같은 시도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차 목사는 기독교적 가치를 담은 뉴미디어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힌트로 ‘공존’을 제시했다. 그는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의견이 아니라면 더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며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교회 문화는 항상 도덕적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점잖아야 한다’ 같은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오히려 십자가에 더 충실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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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아이들을 성에 중독되고 탐닉하게 만드는 조기성애화”
      지난 6일 부산장신대에서 열린 청소년 대상 겨울 캠프에서 한국가족보건협회 김지연 대표가 음란물 예방 및 성중독 회복을 위한 성경적 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얼마전 국제 성가치관 세미나에 강연차 마닐라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외설적 성교육 정책과 싸우고 있는 단체의 대표인 이지나 전도사를 만났다. 올해 2월 그가 주도했던 급진적 성교육 반대를 위한 등교거부운동 (Sit Out 캠페인)을 주도했던 이 대표는,"동성간 성행위를 정상이라고 가르치고 청소년에게 성관계할 권리가 있다고 가르치며 피임약을 챙겨먹으라고 하는 성교육이 캘리포니아를 덮고 있다. 윤리와 도덕은 배제한체 학생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망치는 교육을 공교육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성교육의 명분으로 포르노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학교에 우리 아이들을 보낼 수 없고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성경적 성가치관 교육의 활성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2년 전 서울 D동에 위치한 어느 중학교의 여학생을 둔 학부모들로부터 제보가 떠올랐다. 학교 측이 청소년의 성문화를 다루는 센터에 의뢰하여 중3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실시했고 그 교육이 너무 선정적이고 외설적여 실제로 교육받았던 자녀들의 상당수는 "성적 수치심을 느끼거나 성적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성교육을 받은 여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성교육시간에 남성 성기 모양의 구조물에 직접 콘돔을 씌워 보라는 강요를 받았고, 그에 따라 구조물에 콘돔을 씌우자 그것을 본 남학생들중 일부는 환호성을 지르며" 콘돔 잘 씌우네, 쟤는 밝히는 앤가봐."라고 외치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결국 상당수의 여학생은 수치심을 느꼈고, 또 어떤 여학생은 "내가 이 나이에, 나는 아직 청소년인데 이런 행위를 해도 되는 건가. 죄를짓는 건 아닌가." 라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며 학부모들은 해당 학교에 전화를 하여 사실여부를 확인하게 됐고, 학교측에 항의 전화를 하게 됐다. 몇 명의 학부모는 해당 센터에 실제로 어떤 것을 전시 교육하고 있는지 '항의 방문'을 하게 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센터에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각종 전시물과 집단 난교를 상징하는 '상징물'들이 있었고, "정액은 맛있나요?", "딸 치면 키가 안 크나요?" 등 자극적인 문구가 도배 되어 있는 게시판이 있었다. 또한 실제로 성교육을 진행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조별활동을 시키기도 했는데, 조 이름을 '처녀막 조', '동성애 조'라며 민망한 단어로만 만들어서 활동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동성애나 문란한 성행동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고 그것을 옹호하는 교육으로 도배해 놓은 것도 지적됐다. 청소년의 성문화를 위한 센터라는 그곳은 '내 남자친구의 설레임을 배려한 질 수축 광고'라는 문구가 버젓이 적힌 전단지를 비치해 두기까지 했다." 이곳이 도대체 청소년들이 드나드는 곳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외설적이고, 포르노에 가까운 전시물은 학부모들의 낯을 뜨겁게 했다. 학생 대상 성교육이 있었던 당일에는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다양성으로 인정하자는 동영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며 학생들이 증언했다. 문제는 이런 외설적이고 급진적인 성교육이 D동네에 있는 중학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전의 어느 중학교도 이러한 강사들을 불러 1년에 수차례 강의를 듣게 했는데, 외설적인 성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어느 날 여자교사가 들어온 수업 시간에 모두 바지를 내리고 집단 자위를 하였다는 충격적인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잘못된 성교육은 인간을 개조할 수 있고,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청소년들을 성적으로 자극해서 피임시장등 돈이 되는 성교육, 음란물을 보게 만드는 성교육, 포르노나 다름없는 성교육을 하고 있는 많은 다수의 성교육 강사들의 교육 내용을 보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역시 급진적인 성교육으로 오랫동안 몸살을 앓고 있다. 캘리포니아 청소년 성교육 보건법은 캘리포니아 공립학교에서 "포괄적인 성교육과 함께 에이즈 예방에 대한 정보를 공유시켜야 한다"라며 2016년에 만든 법이다. 이에 따르면 7학년 이상, 즉 중고등학교에서 1년에 최소한 한번 한 시간 이상 성교육을 이수하도록 캘리포니아주에서' 주법'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성교육 지침서 개정을 2019년 5월에 발표하고 개정했다. 주 정부 측은 최근 통계에서 "9,10,11,12학년 중 성관계를 갖는 학생이 32%라면서 더이상 성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한층구체화 된 피임방법, 성 정체성, 성적 취향 등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을 지침서에 추가했다. 이 교육과정이 동성애, 섹스파티, 구강성교와 항문성교를 가르칠 뿐 아니라 자위 도구를 구매할 여유가 없으면 "바나나나 오이, 당근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외설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캘리포니아의 학부모 들중 일부는 이 사태를 파악하고 등교거부운동( Sit Out 캠페인)을 통해 강력히 저항했다. 성윤리와 도덕을 배제한 체 음란물 수준으로 전락한 성교육을 공교육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것은 아동의 성적 학대 혹은 성적 착취에 해당된다. 아이들을 성에 중독되고 탐닉하게 만드는 조기성애화(SEXUALIZATION) 성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생명의 출발이된 자신의 부모를 오히려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유물론적인 인간관을 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프리섹스를 일삼지 말고 사랑하는 이성을 만나 결혼을하고 이땅에 번성하고 충만하자"고 말하는 부모들과 및 기존 기독교적 성질서를 대적하게 함으로써 세대를 이간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한다. 성적 쾌락과 방종한 성문화를 일반화하는 성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그 나이에 마땅히 성화(SANCTIFICATION)되야 할 부분, 성장해야 할 부분들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 지금 전세계는 이러한 선정적인 성문화와 그것을 옳다고 마지막 쐐기를 박는 성교육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 간 아이들에게 정확한 외부 성기의 명칭과 그 사용법, 성관계하는 법을 가르쳤던 덴마크는 고도의 인간 성애화를 경험했다. 원래 성교육이란 일대일로 가정이나 생활 속에서 필요에 따라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을 보호자가 가르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즉진정으로 그 아이의 인생과 그 아이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자가 성교육을 담당하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바른 성교육을 하기 위해 부모가 먼저 알아야 한다. 가장 건강한 성교육은 아이들을 키우고, 청소년을 가르치는 부모와 교사의 바른 성가치관과 성 지식 교육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부모가 일차적으로 성경적 성교육을 받고, 이차적으로 아이들과 생활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일대일로 개인의 상황과 수준에 맞게 가르치는 성교육은 굉장히 중요하다. 아이들 가운데는 성에 일찍 눈을 뜬 아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런데 집단적이나 고도로 성애화시키는 급진적 성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현재의 교육에 굉장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성관계는 인간 모두가, 누구나와 하는 것이 아니다. 성관계는 성경적으로 부부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침소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상은 결혼 이외의 얼마든지 간음해도 되는 성을 말하며 대안으로 성매매나 음란물 혹은 심지어 성관계용 로봇까지 만들겠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 성경적인 성가치관을 다시 한번 정비하고 이성 교제나 결혼, 출산, 임신, 생명과 가족, 이른바 성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성경에 입각하여 먼저 가르치고 양육해야 한다. 80억 인구 중 그 누구도 똑같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다양성의 이름으로 질서를 파괴하거나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성경적 성 가치관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창세기 1장부터 순종하는, "이 땅에 번성하고 충만하며 이 땅을 다스리고 경영" 하는 그 시작을 주님 안에서 시작함으로써 생명의 소중함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가정의 가치, 부부의 사랑, 형제 사랑, 인간 전반에 걸친 성품과 관련한 거룩한 담론을 세워가야 한다. 교회와 가정에 의해서, 바로 신적인 기관에 의해 이 교육이 이루어질 때 많은 영혼들이 옳은 데로 오게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김지연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특임교수, (사)한국가족보건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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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섬들이 주를 앙망하리라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두 번째 줄 왼쪽 첫 번째)가 2016년 4월 제주 한경면 차귀도 포구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인생이든 목회든 어느 시점에서 보면 많은 조각 모음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무의미한 파편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시간과 일상의 연속 선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많은 성도는 특별한 사건만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다. 삶의 연속성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에 따른 결과로 삶과 목회가 이뤄진다.2005년 맨손으로 시작한 제주 목회에서 하신 하나님의 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렇다고 주목할 만한 사역의 열매나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성도들과 사역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의 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나는 어린 시절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자라났다. 서울 신림동 미개발 지역에 있던 성림교회는 놀이터였고 모임 장소였다. 주변에 산이 있고 개울이 있고 과수원이 있고 밭이 그득했다. 교회는 미끄럼틀이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자연스럽게 보수적인 신앙을 형성하게 됐는데, 서울 미림중학교 3학년 때 했던 성령체험은 내 인생길을 바꿔놓았다.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한 내게 고입 연합고사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주님, 제발 고입 시험을 잘 치게 해주세요.’ 마음의 불안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동기가 됐다.매일 교회 종탑 아래 창고로 쓰던 방이나 계단에 앉아 기도했다. 수줍어서 넓은 기도실에서 기도할 용기는 없었다. 시계추처럼 집으로 가기 전 나만의 기도 처소를 들러야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봄이었던 것 같다. 종탑 아랫방이 잠겨 있었다. 계단 끝자락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 “울랄라라 알랄라랄.” 기도하는데 갑자기 내 의지와 다르게 혀가 꼬이며 방언이 터져나왔다. ‘아, 이렇게 크게 기도하다가는 계단을 타고 소리가 퍼져서 누군가 올라오지 않을까.’ 걱정이 스쳤지만 혀와 입술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기도하는 동안 마음의 기쁨과 평안이 임하는 것을 느꼈다.10분쯤 지났을까 했는데 기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1시간이 훌쩍 넘었다. 그날 이후 종탑 아래 계단기도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됐다. 주님의 은혜로 200점 만점의 연합고사에서 180점을 맞았다. 성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셨다. 작은 믿음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맛보게 해 주셨다.고등부 시절 또 한 번의 은혜를 경험했다. 중증 축농증으로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교회 다음으로 많이 간 곳이 이비인후과 병원이었다. 심하면 이틀에 한 번 막힌 코를 뚫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코에 가득 찬 고름을 뽑아내려고 젓가락 길이의 기구를 코 안쪽까지 집어넣던 기억이 생생하다.그 시절은 거의 입으로 숨을 쉬었다. 병원에선 코 안쪽 뼈가 휘어서 수술해야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교회 학생회장을 맡았다. 3일 동안 금식하며 수련회를 인도했다. 수련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에 이런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치료해 주셨다. 이제 축농증은 끝이다.’ 훗날 어머니는 내가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하나님이 제 코를 치료해 주셨어요.”나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축농증으로 이비인후과를 간 적이 없다. 축농증의 치유를 위해 금식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금식에 선하신 하나님은 치유로 보상하셨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금식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배웠다.청년 시절 하나님은 나를 두 번 살려주셨다. 1990년 주일 청년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였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인도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끼이익.” “쿵!” 갑자기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오른편에 승용차가 서 있었다. 운전자가 놀란 눈으로 뛰쳐 나왔다. “학생, 괜찮아?”나중에 알고 보니 차도와 인도 사이를 걷던 나를 승용차가 쳤다. 이후 자동차의 보닛 위로 굴렀고 운전자의 옆에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생명이 위험에 처한 줄도 모르게 천사의 보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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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성경을 읽고 싶지 않을 때 취할 수 있는 7가지 방법
      ©Pixabay   일상생활이 바쁘다는 이유로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에 '성경을 읽고 싶지 않을 때 성경을 읽는 7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이 게재됐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1. 오디오 성경 듣기 성경을 읽는 방법 중 하나로 오디오 성경 듣기가 있다. 친숙한 텍스트를 새로운 의미있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혼에 도움을 준다.  또한 성경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유리하다. 개와 산책을 하거나 치과 진료 예약을 기다리는 동안 혹은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차 안에서 들을 수 있다.    2.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읽기를 시도해보라. 이것은 무의미한 변화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번역본을 바꿔 읽는 경험은 큰 차이를 만들었다.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와 같은 고전적인 번역본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메시지 성경이나 현대어 번역 성경에 도전할 수 있다. 또는 킹 제임스(King James) 버전과 같은 번역본을 읽을 수도 있다. 새로운 번역본을 읽는 것은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배우는 것에 도움이 된다.    3. 시편이나 잠언 한 구절만 읽으라. 언급 한 바와 같이, 성서를 지속적으로 읽는 데 방해가 되는 일반적인 요인은 부담감이다. 1만 2천개의 장과 3만개가 넘는 구절로 이루어진 성경 전체를 다 읽어야 "충분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불안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 분은 단순히 당신을 만나기 원하신다. 1장 이상의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압력 대신 잠언이나 시편 한 구절 이나 한 장에 집중해서 읽는 것도 괜찮다.    4. '고전적인' 구약 이야기를 읽으라. 기독교 문화에서 가장 일반적인 정서 중 하나는 구약 성서에 그리 친밀하지 않다는 것이다. 구약은 신약 성서 길이의 4배에 해당한다. 구약 성서를 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풍요와 깊이를 맛볼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 성서 읽기를 새롭게 하는 흥미로운 방법은 아기들이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주일 학교에서 배운 많은 성서 이야기로 돌아가라. 노아의 방주, 요나와 고래, 홍해를 가른 모세, 다니엘과 사자 굴 등이다. 성인으로서 친숙한 "어린이 이야기"를 읽는 것이 성경 읽기에 도움이 된다.   5. 서면/비디오 커리큘럼 사용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룹 환경에서 일종의 성서 연구 커리큘럼에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의 일대일 시간을 위해 설계된 개별화된 프로그램을 위해 잘 이용하지 못한다. 궁금한 성서의 특정 책이나 당시에 관련된 주제에 관한 비디오 연구자료를 구입하고 의미있는 의도를 갖고 성서를 천천히 묵상하라.  6. 성서에서 영감을 받은 책을 읽으라. 성서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경험에 새로운 통찰력과 에너지를 불어 넣는 놀라운 방법이다. 성서 작가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지속적인 이야기로서의 성경을 주제로 성경 전체와 추가적인 내레이션을 포함해 매끄러운 연대기적인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러한 성경 관련 서적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과 관심,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7.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라. 성경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남기진 가장 강력한 텍스트에 언제든 접근할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유용한 팁을 적용하면 여러분의 영혼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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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1
  • "소강석 목사의 사과 환영 및 동성애 확산 저지 적극 지원 기대한다!"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대표 주요셉 목사   지난 12월 24일 반동연에서 발표한 논평 「경기도성평등 조례 개정 건 왜곡한 소강석 목사에 대한 유감」에 대해 소강석 목사께서 “반동연에게 상처와 아픔을 드렸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성경의 진리를 지키기 위한 반동연의 헌신적인 노력과 진심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 또한 뜻을 같이 하며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사과한 것을 반동연은 모든 동성애 반대운동진영과 함께 기쁘게 생각하며 환영한다.   우리는 이번 사건이 전략적 방법론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에서 빚어진 문제라는 소 목사의 해명과 우군인 반동연(동성애 반대운동진영 모두)에 잘못이 있거나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니었다는 입장표명도 이해하며 흔쾌히 수용하고자 한다. 잘못 제정된 「경기도 성평등 조례」 개정안 협의 과정에서 잠시 의견충돌이 있었지만, 비 온 뒤 땅이 굳듯 앞으로 더욱 긴밀히 소통해 연합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고 한국교회를 사수하려는 원대한 목표에 뜻을 같이하고 있기에, 오해와 갈등이 계속되지 않을 것이고,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우리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은 ‘팀스피릿’ 및 ‘팀워크’이다. ‘팀스피릿’이 있는데 ‘팀워크’가 없다면, 이는 진정성이 없었음을 반증할 뿐이다. 스포츠경기에서 ‘팀워크’가 다져질 때 어떤 강팀도 이겨내듯, 우리는 견고한 ‘팀스피릿’과 단합된 ‘팀워크’로 똘똘 뭉쳐야 한다. 생즉사 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의 정신,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하나 될 때 어떤 외부의 적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소 목사가 재차 “앞으로도 저는 반동연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한국교회를 지키는 사역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탤 것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서로의 진심을 더 깊이 헤아리고 더 하나 되고 결속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한 다짐을 모든 동성애 반대운동진영과 함께 반동연은 환영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제 앞으로 남은 과제는 오해가 발생치 않도록 더욱 긴밀히 소통하며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 목사의 사과 입장표명을 계기로 더욱 하나 된 힘을 발휘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경기도 성평등 조례」 폐지 및 전면개정 운동, 동성애 조장 독재입법인 「차별금지법」 제정시도 저지에 일사분란하게 공동보조 맞추고, 크게 힘 보태주리라 믿고 기대하는 바이다. 2019년 12월 28일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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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1
  • '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사회복지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게 됐어요"
        13일 자신의 교수 채용 소식을 전하며 페이스북에 이지선씨가 올린 사진이다. ©이지선 페이스북   "주님 주신 선물 많이 받은 사람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잘 전하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지난 200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2017년 1학기부터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일하게 될 이지선 씨의 각오다. 13일 이지선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소식을 전했다. 이 씨는 "작년 6월 졸업하고 취업준비생으로 지냈다"며 "12월에 한동대학교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에 지원해 어제 마지막 면접인 총장님 면접까지 보고 돌아오던 길에 최종 합격 소식을 들었다"고 알렸다. 이지선 씨는 "많이 부족해서 학생이었을 때 보다 더 많이 공부하게 될 것으로 살짝 두려운 예측도 해본다"고도 했다. "일생의 3/4을 학생으로 살았다"는 이지선 씨는 지난 2004년 미국 보스턴대 재활상담 석사학위 과정에 입학해 2008년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2008년 9월부터 2010년까지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마쳤다. 이어 지난해 6월에는 미 UCLA(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졸업했다.   ▲지난해 6월 UCLA 졸업식때 찍은 이지선씨의 사진. ©이지선 페이스북     UCLA를 졸업하던 날 이지선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에는 "16년 전 사고 후 병원에서 품게 된 작은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올랐던 그때 그 마음을 기억한다"며 "세상을 바꿀 큰일이 아니라, 내 작은 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내가 했던 말에, 내가 쓴 글에 반응을 해주었던 고마운 이들에게 늘 반가운 소식이 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졸업식, 또 다른 시작인 그곳에서 기도했다"며 "감사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도 전했다. 앞서 이지선 씨는 2000년 음주 음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전신 55%에 3도 중화상을 입어 대수술만 40번이 넘게 받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당시 23살로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씨는 사고 이후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두고 지난 2004년 3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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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1
  •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실수하는 3가지
      매년 1월이 되면 기독교인들은 성경 통독을 목표로 삼곤 한다. 가스펠 코울리션 캐나다의 대표인 와이엇 그레이엄(Wyatt Graham) 목사는 자신의 블로그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는 실수 3가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읽는다. 존 파이퍼 목사는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성경을 읽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잘 읽는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양방향 대화"라고 가르쳤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한가지 방법을 제공한다. 우리는 그 분에게 이야기하고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성령께서는 교제를 중재하시기 위해 일한다.  즉,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다음 그 분이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에 응답하라.    2.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지 않는다.  종종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지 않고 발췌해서 읽는다. 성경 읽기 계획을 세울 때에도 우리는 성경 전체가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는지 고려하지 않고 하루에 한 장만 읽기도 한다.  성경은 특정 아이디어를 전달한다. 사복음서는 각각 그리스도에 대해 네가지 각도에서 증거한다. 바울의 편지에는 목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만약 우리가 시작과 중간 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요점을 놓치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에도 전체 줄거리를 이해하지 않고 세부 단락만을 읽는다면 그 책을 즐기거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때때로 이런 식으로 읽는다. 대신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일관된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3.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이심을 잊는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성경을 기록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했다(벧후 1:21). 성령은 인간 저자들을 통해 영감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벧후 1:21). 하나님은 성경이 존재하게 하셨다. 그 분이 성경의 저자가 되신다.  대부분 이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 신념을 성경을 보는 방식에 적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가 되신다면 성경의 각 책들(다양한 인간 저자, 환경, 주장에도 불구하고)은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다(엡 1:10). 성경의 모든 책은 이 목적을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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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0
  • 보수정치와 진보정치의 인간론
      김민호 목사   정치의 대상은 인간이다. 고로 정치의 방향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마치 기독교 역사에서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구원론의 접근방식이 달라진 것과 같다. 개혁파 교회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었기 때문에 "오직 믿음"을 외쳤다. 하나님께만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의미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전혀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행위구원"을 주장했다. 인간 자체의 구원 가능성을 뜻한다. 알미니우스는 인간이 부분적으로만 타락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행위와 믿음"이 다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구원을 위해 인간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정치도 인간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라서 '정치관'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베리 골드워터는 "정치 사상가의 첫 번째 임무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일이다"라고 했다1).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보수적 정치관과 진보적 정치관으로 갈라진다. 보수적 정치관은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개혁자들의 인간관이 전제된다. 인간 자체에는 소망이 없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따를 때 비로소 소망이 있다고 본다. 에드먼드 버크는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진정한 인간성만 획득하려 해도 인간은 모든 의지와 미덕을 다 소진해야 한다"고 했다2). 그러므로 러셀 커크의 주장처럼 보수정치는 "역사와 인간의 본성을 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겸손하게 노력할 것이다"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3).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겸손하게 노력"하는 방식이 바로 보수정치관이다. 과거 역사나 선조들의 탁월함에서 교훈을 찾는다. 보수는 검증되지 않은 정치적 실험이나 혁명을 거부한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찾지 않는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찾는다. 인간이 철저하게 계획하고 설계하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무한히 개선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이상향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해가며, 언제나 미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고 본다4). 이런 관점의 정당성을 위해 하나님의 섭리자리에 우연과 진화를 전제한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다. 에드먼드 버크의 주장처럼 "프랑스 혁명이 결코 단순한 정치적 실험이나 계몽의 정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한 무질서라는 질병"이라는 점은 적절한 지적이다5).   인간이 유토피아를 산술적으로 도출 해낼 수 있다는 사고는 계획경제와 큰 정부이론을 주장하게 했다. 국가가 철저히 계획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를 책임지면 모두가 공평하고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국민이 정부에 의존되면 그만큼 인간의 자유는 억압된다는 것이다. 복지를 극대화 한 나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부는 정부가 원하는 일률적인 사람들을 만들려 한다. 여기서 신앙의 자유는 억압된다. 진보 정치철학의 이면에 하나님의 섭리가 무시된 당연한 결과다. 오늘날 자유의 억압은 자녀의 성(gender) 정체성까지 통제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엔 인간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과 개성(다양성)은 사라진다. 인간은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부속품이 될 뿐이다. 국가가 빵을 분배하는 주체가 되면 권력은 당연히 절대화 된다. 분배받는 자는 분배 하는 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정치인이었던 액튼 경(Lord Acton)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했던 말을 떠올려야 한다6). 반면 보수주의 정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 본다. 평등보다 자유를 중요하게 본다. 때문에 국가의 간섭이 최소화되고 최대의 자유가 보장되는 작은 정부를 지지한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할 여지를 많이 둘수록 탁월해진다. 베리 골드워터의 주장처럼 "인간의 물질적 요소만 바라보지 않고 전반을 고려한다. 보수주의자는 인간이 부분적으로 경제적 창조물이요 동물적 창조물이지만, 동시에 정신적 욕구와 정신적 욕망을 가진 정신적 창조물이기도 하다고 믿는다."7) 다음 칼럼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자유 문제를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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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0
  • 최근의 이란 사태를 보면서
    ▲이만석 선교사ㅣ한국이란인교회 담임목사   지금 이란 여행 가도 되나요?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다음 달에 이란에 여행 계획을 잡아 놨는데 지금 이렇게 어수선한데 가면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문과 방송을 보면 연일 미국의 거셈 솔레이머니 사살 사건 때문에 이란에서는 미군 주둔 캠프에 미사일을 쏘는 등 이란과 미국이 곧 전쟁이라도 치를 듯이 으르렁대는 것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뉴스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미국과 이란 모두 전쟁을 원치 않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라고 했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큰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렇게 무책임한 대답을 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대답을 한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란에서 20년을 살아 본 사람이다. 이란의 치안은 중동에서 최고 안전한 나라라고 자부하고 있으며 필자도 이를 인정한다. 필자는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치열했던 1986년부터 근 20년간 이란에서 살았다. 80년9월에 시작된 이 전쟁은 88년 8월까지 계속되었다. 미국이 이란의 비행기 부품제공을 금했기 때문에 이란의 전투기들은 한 대도 뜨지 못하는 동안 이라크의 공군기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 상공까지 날아와 민가에 미사일을 쏘고 돌아갈 정도로 치열했었다. 그 때까지 이란의 구호는 "장그 장그 타 피루지(승리할 때까지 전쟁, 전쟁이다)" "터 억하린 까트레예 훈(마지막 피한방울까지)"라고 외쳐댔으나 수도 테헤란에 155발의 미사일을 맞으며 호메이니 옹은 "이라크에서 먼저 유엔에 평화안을 제출했으니 우리가 이겼다"고 승리를 자축하며 전쟁을 끝냈다. 만일 한국 같았으면 수도 서울에 미사일 한 발만 떨어져도 보따리 싸서 피난한다고 공항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란 사람들은 언제 또 미사일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도망갈 생각은커녕 미사일에 파괴된 집과 깊이 파인 웅덩이로 몰려들어 구경하느라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때는 이란과 이라크라는 두 이슬람국가끼리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민간인들에게도 폭격을 가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상대가 미국인 것이다. 만약에 진짜 전면전이 벌어지더라도 미국은 결코 민간인들에게 폭격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안전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근래에 지금처럼 이란이라는 나라에 한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도 없었다. 이런 기회에 중동의 패권을 추구하는 이란을 좀 더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란은 성경에 등장하는 고레스, 다리오, 아하스에로,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압버스, 거저르, 팔레비 왕까지 2,500년간 왕이 다스리던 나라다. 마지막 왕인 팔레비 왕은 친미 성향으로 이란 경제를 중동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당시 이란 사람들은 유럽에 버금가는 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때 왕을 대적하다가 외국으로 추방당한 호메이니는 "만일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땅에서 펑펑 나오는 기름 팔아서 국가 운영하고 남는 돈은 각 가정에 배달해 주겠다. 돈이 남는데 왜 국민들에게 세금을 거두는가?"는 등의 말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은 1979년 이슬람 혁명에 성공하여 팔레비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국호에 이슬람을 삽입하고(Islamic Republic of Iran) 이슬람율법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었다. 혁명 후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피신하고 이라크와 전쟁 통에 전사자들에게 "순교자"칭호를 주며 유가족들에게 트럭이나 트레일러를 한 대 씩 주는 등 선심을 쓰며 국민들의 마음을 달랬으나 재정이 고갈되자 선심도 사라지고 세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전쟁 중이라서 어쩔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착한 국민들은 이해를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도, 호메이니가 죽어도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통치 경험이 없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모든 기관의 최고 결정권자는 이슬람 성직자들로 세웠다. 그러니 팔레비 때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던 진짜 실력 좋고 경험 많은 사람들은 재산 정리하여 대우 좋고 안전한 해외로 빠져 나가고 경제는 곤두박질하기 시작했다. 만일 그 때 팔레비 왕 밑에서 충성했던 경험 많은 고급인력들을 기용해서 "당신들이 계속 나라와 경제를 운영하고 우리는 백성들의 영적인 성숙을 교육하는 신앙부분만 책임지겠다"고 했다면 이란은 지금도 부강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 때 재산이 많거나 벼슬했던 사람들을 축출하고,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죄인 취급하며 처벌하면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고 여성들은 히잡을 의무화하고 여성 법관들은 모두 해고하는가 하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는 등 이런 모든 일들을 이슬람의 이름과 신앙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경제는 곤두박질하니 어떤 국민이 이런 정권을 지지하겠는가? 정부가 이슬람 율법을 강요할수록 호주머니가 비어있는 국민들은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입법부와 사법부 및 매스컴과 군부와 치안을 장악한 정권은 국민들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도 삼권분립이 존재하고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서 지도자도 선출하기도 하고 국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하고 재판을 통해서 사형을 언도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도 이슬람율법의 최고 결정권자인 종교지도자(Supreme Leader) 허메네이(Khamenei)의 추인을 받아야 효력이 발생한다. 이란의 대통령선거는 매우 특별하다. 건강한 무슬림 남성이면 누구든지 출마가 가능하기에 수천 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한다. 그리고는 후보가 너무 많아서 국민들이 선택하기 좋도록 일차 자격심사회의를 거쳐서 4명 정도로 후보를 압축시킨다. 이 때 이미 이슬람성직자들의 기준에 안 맞는 사람들은 모두 걸러지고 국민들이 누구를 선택하든 정권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국회의원 출마도 역시 마찬가지다. 일차 자격심사위원회에서 정권과 코드가 안 맞는 사람들에게는 출마 자격이 박탈된다. 심지어는 직전 회기 국회의원들도 출마 자격이 박탈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경제만 좋다면 이란 국민들은 누가 다스리든지 상관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다. 이란이 핵무기를 만든다고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게 되자 세금이 순식간에 3-4배가 뛰는가 하면 휘발유 값이 몇 배가 뛰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팔레비 축출 전 1979년 당시 미화 1$는 70리얄이었다. 화폐 개혁 없이 계속 평가절하 되어서 2011년 말 1$당 9,800리얄 하던 것이 2012년 초 17,000리얄로 뛰더니 2018년 초 4만 리얄에서 2019년 초 11만 리얄이 되었고 2020년 1월 현재 13만 2천리얄이다. 2019년 11월 중순에도 이란에서는 경제가 어려워지자 휘발유 값을 올렸다. 1 리터 당 1만 리얄 하던 것을 1만5천 리얄로 올렸다. 그러면서 자동차 한 대당 한 달에 60 리터로 소비량을 제한하고 그 이상의 연료가 필요하면 리터 당 3만 리얄에 사서 쓰라는 것이었다. 이란은 땅이 넓어서 도시간 거리가 수백 Km 정도 되니 60리터로는 한 달간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결국은 유가가 300%로 인상된 것이다. 이란의 일반 노동자들의 일당은 2020년 3월21일까지 유효한 정부 고시 최저임금에 의하면 50만5627리얄(현재 환율로 미화 약 3.8$)이다. 국민들은 정권에 대한 불만이 표출될 경우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유가 인상으로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여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나고 최고 지도자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사태로 확산되자 강력하게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천 명을 체포했다고 한다. 이란 정부도 국민들의 경제적 불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불만을 경제적으로 해소시켜줄 만한 능력은 없고 그것을 미국에 대한 분노 쪽으로 전환시킬 작전을 짜고 있었다. 그래서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거셈 솔레이머니 혁명수비대 사령관이 이라크에 있는 민병대를 시켜서 미군들을 공격함으로 미군의 반격을 유발시키려 했다고 한다. 솔레이머니는 지난해 10월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관이 내려다보이는 바그다드의 티그리스 건너편 모처에서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지도자들을 만나 "이란이 신형 무기를 제공할 테니 미군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여라"고 주문했으며, 이들이 만나기 직전에는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카타입 헤즈볼라(KH)에 레이더를 피하는 기술을 갖춘 최신 드론으로 미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솔레이머니는 또 미국인 거주지를 타격할 민병대를 새로 구성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2020.1.7. 동아일보) 그래서 이라크 시야파 민병대는 2019년12월27일 키르쿠크 미군기지에 로켓포 30발을 발사해 이라크계 미국인 통역사 노리스 하미드(33)를 살해하고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에 미군은 공격 주체로 보이는 카타이브 헤즈볼라와 연관된 목표물 5곳을 공습해 25명을 사살했다. 그러자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지지자들이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주변에 모여들어 폭력시위를 했다. 이들은 50여개의 텐트를 치며 급식소와 의료시설까지 완비하고 장기 농성을 꾀하며 담장과 입구 시설물에 불을 지르며 본관 진입을 꾀했다.(2020.1.2. 뉴데일리) 그리고 1월3일 배후를 알 수 없는 바그다드 국제공항에 로켓포 공격으로 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1월3일 미국은 드론 공격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거셈 솔레이머니를 사살한 것이다. 이 때 미국은 "우리는 이란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거셈 솔레이머니를 사살한 것이다. 만일 그를 살려두었다면 많은 미국인들이 살해당했을 것이며 그러면 이란과 미국의 전쟁은 불가피했을 것이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이미 2019년4월8일 중동에서 함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며 활동하고 있는 이란의 혁명수비대를 테러단체로 지정했으며 이번에 그 사령관을 제거한 것이었다.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한 것에 대한 분노로 이라크 의회는 미군 철수를 의결했으나 미국은 "적당한 때에 철수 하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는 입장이다. 이란은 이에 거셈 솔레이머니를 순교자로 지칭하며 국가적인 장례행사를 통해서 반미감정을 고조시키며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일단은 성공했다고 보인다. 숨진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거셈 솔레이머니의 딸은 장례식에 참석한 하산 로허니 대통령에게 "누가 복수해 줄거냐"고 묻자 대통령은 "우리 모두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1월 7일 장례식이 끝나자 바로 이라크의 미군기지를 향해 수십 발의 지대지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란은 이 공격이 매우 후련한 복수였으며 이로 인해 약 80명의 미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국영방송을 통해서 발표했다. 그러면서 만일 미국이 또 다시 이란에 보복한다면 더 큰 공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일단 복수의 모양새를 취해서 국민들의 분노도 달래고 체면도 살렸지만 전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는 입장표명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52개의 공격목표를 정했다고 발표하면서 대규모 전면전이 곧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조성되었지만, 이란은 공격을 감행하기 1시간 전 이라크에 공격 사실을 통보했으며 미군이 대피할 시간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실제로 미군의 인명피해는 없었다는 보고를 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공격 대신에 경제 보복을 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서 미국과 이란의 전면전 가능성은 희박해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솔레이머니와 함께 사망한 아부 마흐디 알무한디스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PMF) 부사령관으로 인해 이라크 민병대가 미군에 보복성 공격을 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불씨로 남아있긴 하다. 미국에서는 이들도 이란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해야 하겠지만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언제나 이란이 경제가 좋아져서 먹고 싶은 첼로케밥을 돈 걱정 없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까? 언제나 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질 수 있을까?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슴 속에 있는 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날이 기다려진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는데 지금 이란은 깊은 밤으로 보인다. 멀지 않은 장래에 이란 사람들이 도시마다 교회를 세워 예수 그리스도를 목이 터져라 찬양해도 아무도 체포하러 오지 않는 날이 오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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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7
  • 나사렛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압바’ 호칭
      김영한 박사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 감히 부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압바"(Aββα,  abba, 아버지)라는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아버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15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축제에 부모와 같이 와서 없어져 버렸는데 부모가 근심하여 찾다가 성전에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질책한다. 이에 대하여 소년 예수는 독특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소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압바"(abba)라는 호칭은 독특하다. "내 아버지 집"이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인 하나님의 전을 말한다.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할 때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친근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었다. 유대교 문헌에 정통한 독일의 신약학자 여호야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압바"(abba)라는 단어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쓴 아람어라고 밝히고 있다.   I.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 토기장이와 진흙,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집단적인 내지 비유적인 의미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려하였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예수는 자기와 우리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격상시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예수는 우리의 친구요, 우리는 예수의 친구로서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예수는 맏형이여 우리의 그의 형제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II. 호칭 "압바"(Abba)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압바"(아람어로는 abba, 아버지)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예레미아스는 당대의 유대교 문헌을 연구한 후에 "유대교 기도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바'라고 언급한 유비를 전혀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구약 전체는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성을 강조하고 야웨와의 친밀성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한데 반해서 예수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아주 친근한 용어로 불렀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1.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신뢰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예수는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예수는 하나님이 무섭고 벌을 주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마련해주시는 부모보다 더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신다. 2.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3.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儀式)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소박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성과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4.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해지고 우리의 인생은 더욱 깊어진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묻는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유대인들에 의하면 질병은 죄의 결과이다(요 5:14). 맹인의 경우는 그 부모의 죄의 결과로 보아야 했다. 예수는 대답하신다: "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맹인은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씻고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다(요 9:7). 맹인은 보게 됨을 통하여 그를 치유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맹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자녀인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그 분의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드신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5.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그의 자녀에게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 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라고 돌아온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시고 잔치상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6.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고 인종이란 진화가 빚어낸 적자생존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을 받은 창조의 작품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아바지 되심 앞에서 모든 인종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하나님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진화론적 인간관은 인간을 자연과정이나 만물과 다름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동등하며 자연보다 존귀하다고 본다.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III. 예수의 영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믿음 안에서만 계시되고 그 안에서 호칭되어진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압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압바!"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압바"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끝)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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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신학자의 혀가 맵다고 뽑으려 하면 안돼”
          성산생명윤리연구소가 총신대 이상원 교수(조직신학)에 대한 이 학교 법인이사회의 바른 판단을 촉구하는 입장문을 16일 발표했다. 이날 이사회도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연구소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 성정치 이론에 매몰된 그룹의 주장만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 같아 개탄을 금치 못한다"며 "신학교가 바로 서야 바른 목사가 나오고, 바른 목사가 바른 설교로 바른 신앙인을 세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총신대 당국자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오늘 열리는 이사회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로 핀단 할 수밖에 없다"면서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만 안 되어있지 실제적으로는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학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 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했다. 또 "신학자의 혀가 맵다고 혀를 뽑으려 하면 안 된다. 진정한 신앙인은 비록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이 교수와 같이 제2, 제3의 이상원 교수가 되어 총신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과 맞설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아래는 입장 전문.   지난해 12월 5일 총신대 정문 앞에서 열렸던 총신대 이상원 교수 관련 기자회견 모습   총신대학교는 선지동산의 정체성을 회복하라.   대학 지도자의 영적 분별력이 떨어질 때 사탄은 여지없이 침투해 들어온다. 바른 교리를 추구해야 할 신학교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할 때, 작은 누룩에 점령당해 버린다. 바른 교리와 윤리기준을 가르치는 교수를 징계하려고 달려드는 지금의 행태는 신학대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신실한 장로교인들의 눈물과 신앙으로 세워진 총신대학교가 다시 깨어나야 나야한다. 영적 장님이 되어 말씀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 혼합된 신학과 세상시조에 밀려 맥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라.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총신이 되기 바란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성정치 이론에 매몰된 그룹의 주장만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 같아 개탄을 금치 못한다. 세상은 성(性)을 무기로 성도와 가정과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다가온다. 제일 먼저 공격하는 대상은 목사와 신학교다. 신학교가 바로 서야 바른 목사가 나오고, 바른 목사가 바른 설교로 바른 신앙인을 세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총신대 당국자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신학과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총장은 한국교회와 총신의 미래를 위해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 열리는 이사회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로 핀단 할수 밖에 없다.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만 안 되어있지 실제적으로는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학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 하고 있는 현상이다. 신앙의 자유와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는 자유는 신앙의 선배들이 피 흘리기까지 싸운 결과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학자의 혀가 맵다고 혀를 뽑으려 하면 안 된다. 진정한 신앙인은 비록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별히 이상원 교수의 경우를 볼 때 다른 영역에서 이런 방법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상대를 잘못 집었음을 분명히 경고하고 밝혀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상원 교수는 비록 향후 어떤 결론이 날지 모르지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불명예를 감수하며 주님과 함께 치욕의 영문 밖으로 나갈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수와 같이 제2, 제3의 이상원 교수가 되어 총신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과 맞설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다. 진리를 지키고 학교를 지키려는 이상원 교수의 명예회복과 총신대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모든 단체들은 이상원 교수 징계철회를 주장하는 56개 합동측 노회장들과 함께 거룩한 분노에 참여할 교수, 학생, 졸업생 등 모든 분들과 연대하여, 법적대응을 포함한 모든 방법을 다해 맞서갈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진리를 지키는 자리라면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사회와 총신대  당국에 엄중히 경고한다. "존 낙스의 기도는 100만 명의 군대보다 더 두렵다."고 고백한 영국 메리 여왕의 고백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도 이교수를 위해, 진리를 지키고 총신대를 지키기 위해 세상에 무릎 꿇지 않은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가 끊임없이 주님의 보좌로 올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이제 깨어있는 총신대 교수들와 학생들에게 다시금 신앙의 양심과 학자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신앙의 양심에 따라 두려워하지 말고 같은 목소리를 내어 주십시오. 개혁주의 신학의 선지동산의 상징인 이상원교수님을 지켜 주십시오  총신대를 지켜 주십시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합시다. 성산생명윤리연구소(소장 이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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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갈등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려면
      갈등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   ▲정재영 교수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갈등 속에서 보내왔다.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촉발된 정치 갈등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이는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진영 논리와 이념 갈등이 있고, 이러한 입장 차이에 따라 서로의 주장에 대해서 근거 없는 비난을 일삼기도 했다.이에 따라 우리 국민 10명 중 7명은 과거보다 갈등이 심해졌다고 느낀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 조사에서는 빈자와 부자, 진보와 보수, 노동자와 사용자, 청년과 중장년층 사이의 대립이 한층 깊어졌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특히 조국 전 법무장관의 임명을 둘러싼 혼란으로 사회 갈등이 더 커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70%에 육박했다. 2016년 국정농단 때는 촛불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탄핵을 외쳤는데, 지금은 탄핵으로 집권한 정부에 대한 성토가 한창이다.이 조사에서는 여러 사회 갈등 중에서 빈부 갈등이 심각하다고 본 의견이 77.3%로 가장 컸다. 최근 부동산 가격 상승, 최저임금 인상, 세금 문제 등이 이슈가 되면서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이에 따라 빈부 갈등이 더 심화됐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젊은 층에서는 성별 갈등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20대에서는 74.9%가 성별 갈등을 사회 주요 문제로 꼽았다. 20대는 성 차별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줄이려는 노력에 대해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면서 오히려 남성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되고 있다.세대 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고령 사회가 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데 그동안 뒷방 노인네 취급당하며 소외감을 느꼈던 노인들이 힘을 모아 당당히 의사 표현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력을 이뤄 사회단체를 결성하기도 한다.이들은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디지털의 힘을 빌려 유튜브 방송을 하면서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기도 할 정도로 매우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넘쳐나는 정보들 중에는 근거 없는 가짜 뉴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이러한 노인 세대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와의 사이에 갈등은 더 심화되고 있다.특히 일부에서는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여서 매도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서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단순히 북한을 도운 경험이 있다든지 북한에 다녀 온 경험만으로도 ‘종북’이라고 매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일부 교계 인사들도 이러한 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동안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갈등 문제로 여겨졌던 지역 갈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이러한 이념 갈등이 더 부각되고 있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갈등에 빠진 한국 교회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정교분리를 주장해 왔고,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왔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권에 대해서조차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생각으로 집권 세력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 왔을 정도이다.그런데 오랫동안 집권했던 보수 정당이 힘을 잃고 진보 성향의 정당이 들어서면서 교회의 입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을 만들기도 하고 시청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진보 성향의 목회자들이 민주화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정치 활동을 벌였는데 최근에는 보수 성향의 목회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양상이다.이러한 모습은 개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예배 후에 교회당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정치 발언을 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시국과 관련해서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 온 사람들과 서초동에 나갔다 온 사람들이 제각기 집회 현장의 모습을 전달하며 자신의 입장에 동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일부 교회에서는 대표 기도를 하는 중에 현 정부를 비판하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젊은이들이 크게 반발하기도 하고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그런 기도 내용이 교회의 공식 입장인지 묻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빈부 갈등과 세대 갈등, 그리고 성별 갈등 등의 사회 갈등도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연되며 성도들끼리 부딪히고 있다.교회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매우 금기시해왔던 기존의 풍토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물론 교회에서 정치 토론 자체를 금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사회 모습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노력은 자연히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다.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건전한 대화와 토론이 아니라 상대방을 굴복시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갈등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는 갈등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함으로써 죄악 많은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지 않으셨고 정치적인 선동가가 되지 않으셨다. 세속의 가치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여주셨고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안겨 주셨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빠져서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 바쁜 모습이다.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이념을 넘어 신앙을 바라보아야 하고 신념을 주장하기 전에 성경의 가르침을 되새겨봐야 한다. 토론을 할 때에는 자기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억눌림을 토로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어야 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기보다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구원하셨지만 자기 몸을 제물로 내어주셔서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신 방법으로 화평케 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새해에는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를 화평케 하는 도구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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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악의 영들이 다음세대를 실족케 하는 도구 ‘성혁명’
      김지연 대표(한국가족보건협회,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특임교수)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건전한 성가치관은 주류로 인식돼왔다. 성 문제에서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에 있어 성경이 다림줄 역할을 해 준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말씀대로 성별은 남자와 여자 두 가지며, 마태복음 말씀대로 결혼은 1남과 1녀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 십계명에 따라 간음은 죄라는 인식 등이다. 성매매하는 것은 죄다, 성관계는 부부끼리만 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죄다, 근친상간해서는 안 된다 등의 인식도 성경적 성가치관의 한 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성별은 남녀 두 개만 있는 게 아니라 여자, 남자, 트랜스젠더, 중성, 양성동체 등 수십 가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 동성애 옹호론자, 인권활동가, 정치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동성결혼을 통과시킨 나라가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30개에 육박하고 있다. 간통죄 처벌법을 폐지하고 간통을 성적 결정권으로 인정하는 나라도 증가하고 있다. 돈으로 얼마든지 성을 사고팔아도 된다며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도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동성애를 비판하는 행위가 오히려 죄라는 법을 만들어 버린 나라가 50개가 넘는다. 심지어 소아성애도 성적지향으로 인정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인권단체가 북미에 등장했다. 기존에 성적인 타락이나 죄악으로 여겨지던 것이 이제는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권리'이자 '선택권'이라며 법을 통해 강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타락한 성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흐름이 거세다. 성윤리와 성도덕을 파괴하는 법을 반대하는 선량한 시민을 오히려 소송하고 매장하는 성읍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고도로 성애화(sexualization)된 사람들이 그 성읍들을 채우고 있다.   대책 없는 관용주의(tolerance policy)와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은 진리에 따라 올바름을 외치는 이들의 호소를 낡은 가치를 붙든 꽉 막힌 보수주의자인 것처럼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다음세대에게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네가 원하는 모든 방식의 성적 만족을 취하라'며 독약을 주고 있다. 마치 이런 흐름에 편승하는 게 아주 훌륭한 처세술처럼 보인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찬양을 들으며 눈물 흘리면서 감정의 요동을 느끼는 과정만으로 거룩이 입증된다면 얼마나 간편하고 좋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현상만으로는 우리의 거룩이나 성화가 입증되진 못한다. 그 눈물이 정말 거룩해지는 과정에서 나온 눈물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로 나온 눈물이었는지 당장 그 현장에서는 바로 알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 찬양의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간 나, 즉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 내가 나의 이웃, 가족, 원수를 대하는 태도, 내가 어둠속에서 즐기는 스마트폰 노트북 컴퓨터 앞에서 우리는 그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어두운 방, 아무도 없을 때 스마트폰, 노트북 앞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즐기는 자인가가 낮의 찬양 예배 시간에 흘린 눈물의 실체를 말해준다.   정치적 올바름주의(pc)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성경적 성가치관을 엎어버리고 구조와 질서, 윤리를 무너뜨리며 신권을 짓밟는 허황된 인권 만능주의 세상을 향해 맹렬히 돌격하고 있다. 동성애는 죄가 아니며 인권과 다양성, 자기 성적 결정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성별은 얼마든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으며, 간통도 성매매도 죄가 아니며 오로지 개인의 성적 결정권이라며 항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경적 악행을 얼마든지 할수있도록 보장받기 위해 법과 제도를 뜯어고치는 위험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 있다.   신앙적 양심을 마비시키는 법과 제도, 문화의 확산은 끔찍한 젠더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해 대중적 인기를 끌며 가짜 인권을 정상으로 정착시키고자 꿈꾸는 인권 감성팔이들이 득세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혼전 순결을 지지하면 율법주의자나 강박증 환자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성관계는 부부간에만 해야 한다"고 말하면 조선시대 꼰대 취급을 받는다. 동성 간 성행위를 반대했다간 사회적으로 생매장당할 것을 감수해야 할 정도다. 그렇다 보니 '호모파시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호모파시즘이란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가는 불이익, 왕따,소송 배척 등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동성애 독재적 사회분위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렇게 밑바닥 모르고 처절하게 성경적 성 가치관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교회는 아무런 악영향을 받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영적 부흥을 누릴 것이라는 건 착각이다.   우리는 다음세대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줘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성경에 근거해서 가르쳐야 한다. 특히 성경적 성가치관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마지막 때 악의 영들이 다음세대를 실족하게 하려고 사용하는 도구가 성 혁명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연약하다. 고린도 전서 13장이 말하듯 우리는 아직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온전하신 주님의 지혜만을 의지해 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공중에 붕 떠 있지 말고 착지해야 한다. "은혜로운 청소년 캠프를 잘 마쳤습니다. 거기서 찬양을 드리며 눈물 콧물 다 쏟고 주를 위해 죽겠노라 맹세까지 했다"라는 캠프 후기를 쓴 청년들이 막상 "동성애는 죄이며 동성애 차별금지법 막자"라는 목사님들 설교에는 "왜 동성애가 죄냐, 설마 성경대로 동성애가 죄라고 그대로 믿느냐? 나는 인권 혐오적인 기독교인은 아니다."라며 승냥이로 변하는 청년들 태도에 충격을 받은 목사님의 제보를 받기도 한다. 다행히 그런 청년들도 동성애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및 성경에 관련된 강의를 듣고 나면 태도는 바뀌고 회개한다.   우리는 더욱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며 죄와 싸우며 진리 안에서 거하며 감사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 성교육강사라고 타이틀을 스스로 붙인 자들도 프리섹스를 인정하거나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외부성기위주의 외설적인 성교육을 일삼는 자들을 주의해야 한다. 세상은 '불륜, 동성애, 성매매, 수간 등이 불의한지 의로운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구별하지 말자'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도덕한 행위조차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원하는 대로 다 누리자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불법 앞에서 성경은 단호하게 그와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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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보석이 아닌,'원석'인 나와 당신'
      세종대 트루스포럼 황선우 대표   사랑할 사람을 만나고 싶다며 보석을 찾는 사람들, 그러나 보석은 없다. 울퉁불퉁하고 못난 원석만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보석이 되기 위해 빚어져야 할 방향성이 있을 뿐이다. 한 없이 부족한 원석일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의 완벽함 때문이어선 안 된다. 단지 그 사람과 함께 걷고 싶기 때문이어야 한다. 그 걸음이 남들보다 뒤에서 걷더라도, 혹은 천천히 걷더라도 말이다. 그 걸음의 방향 또한 중요하다. 어떠한 일시적이고 헛된 것이 아닌, 참보석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이상형을 그리며 계산 요소만 늘어나는 사람들의 머릿속, 이제는 여기서 벗어나 나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원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계산이 아닌 '분별'을 통해, 무엇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옳고 그른지를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이 자신의 계산에 들어맞는가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닌, 진정한 아름다움을 분별하여 볼 줄 아는 지혜 말이다.   지금 부족한 것? 괜찮다. 아니, 나와 당신은 영원히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또 그 방향을 향해 어떻게 걷고 있는가 하는 것은 영원히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이다. 틀어질 때마다 바로잡고 또 걷고, 넘어지고 또 바로잡고 걷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석인 나와 당신은 조금씩 빚어져 보석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석으로 빚어져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즐거운 일이 된다. 한 없이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 두 울퉁불퉁한 원석이 만나 함께 보석으로 빚어져가는 과정,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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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사회통합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경동교회 원로 박종화 목사     한 창조주와 여러 피조물 사회통합의 시급성 배후에는 사회갈등과 분열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혹자는 현재의 상황을 전례가 없는 “초 갈등 사회”로 진단하기도 한다.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안은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상황과 갈등의 성격과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전문적이고 공감되는 처방을 내어 놓고, 나아가 이를 구체적으로 사회의 통합으로 이끌어 가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기독교적 역할을 묻고 답하려면 신학적, 신앙 고백적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갈등과 통합의 현장은 인간사회이며, 그 주인공은 인간이며, 사회와 인간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세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하나는 창조주는 창조된 인간과 세계를 보시고 “참 좋다”고 하셨고, 이 참 좋은 인간세계의 모습을 “샬롬”(Shalom)이라고 성서는 증언한다. 샬롬은 “인간세계의 평화와 정의 및 자연세계의 보전, 이 둘이 합쳐진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뜻한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갈등은 샬롬을 깨뜨리는 잘못이거나 심지어 파괴시키는 죄악일 수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저주를 몰고 온다. 동시에 기독교가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작업에 나서고 동참하는 것은 창조주가 선물로 주신 샬롬을 회복하라는 사명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축복을 동반한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 앞에서 “책임지는” 결단의 행동이 기독교적 사명이다. 둘째로는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의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으며, 인간사회는 이 형상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피조물끼리의 갈등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요 통합은 그 형상의 회복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명하신 이중의 사랑의 계명과 구조가 동일하다. “하나님 사랑”은 항상 “이웃 사랑”을 척도로 하며,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지향한다. 사회적 삶 속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은 공동체적 인간의 필수요인일 뿐만 아니라 “나 - 이웃”이 함께 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공동으로 기쁨으로 누리는 축복이다. 셋째로는 갈등과 통합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십계명 제1계명이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마라.”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려는 파괴적 갈등은 거개가 갈등의 당사자 개개인이나 집단이 상대방을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보고 매도하거나 적대화로 몰고 가는 과정에서 생긴다.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의 획일성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절대화요, 나아가 자신의 신격화이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어느 이념이나 체제나 제도도 신일 수 없고 신격화될 수도 없다. 절대적인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신의 형상을 지닌 다양한 인격체이다. 십계명 제1계명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위한 인권선언이고, 진정한 민주사회의 성서적 근간이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마라 – “중심”이 되라 기독교 세계가 갈등을 극복하며 통합을 추구하면서 내세우는 원칙이 있다 (잠언 2:27):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라”(개혁판),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라”(표준 새 번역판). 상식적이지만 몇 가지 주석이 필요할 것이다. 가는 방향은 좌나 우가 아니다. 방향은 앞이다. 역사의 방향은 뒤도 좌도 우도 아닌 “앞”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앞”에 계시다. 좌와 우는 방향이 아니라 앞으로 가기위한 두 날개이다. 인간의 몸은 좌우의 두 팔, 두 다리, 두 눈, 두 귀로 움직인다. 둘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 건강한 몸으로 산다. 어느 한 쪽이라도 실족하면 장애자가 된다. 중풍환자가 된다. 그러면 미래의 진로를 막는다. 갈등을 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대안은 좌우를 통합하되 “앞으로”, “미래로”를 공동의 방향으로 수용케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방안이다. 예컨대 “선진 자유 민주사회, 선진 공정 복지사회, 선진 문화예술시대, 민족 통일과 평화시대”라는 우리 사회 미래의 비전을 공유케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래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보다 더 깊고 넓고 높게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이라고 확신하며 실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하나 현재 우리사회의 “초 갈등” 현상은 건강한 몸을 지탱하는 건강한 두 팔과 다리의 경쟁이나 생산적 갈등이 아니라, 극좌와 극우의 극단주의가 대결하는 파괴적 갈등이다. 그것은 잠언이 경고하는 “빗나감”과 “치우침”의 전형이다. 두 팔과 다리 중 한쪽으로 빗나거나 치우치면 중풍환자가 된다. 그런 사회는 장애사회요 중풍환자 사회이다. 극단주의는 그것이 극좌이든 극우이든 사회를 경직시킨다. 좀먹는다. 파괴한다. 빈부 간에 극단으로 치닫는 격차가 그러하고, 노사 간의 처절한 극단적 갈등이 그러하고, 힘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가 갑과 을의 관계로 극단화되어 가는 모습이 그러하고, 잠정적으로 수그러진 모습이나 여전히 극단적 폭발성을 지닌 지역차별과 갈등이 그러하고, 때 늦고 낡은 구시대적 이념갈등이 그러하다. 특히 이념갈등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경우 신앙화로 치달아 신의 이미지도 이념화 시키는 과오를 즐겨 범하고 있기도 하다. 극단주의로 치닫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자기편이 아니면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적 진영논리를 생성해 낸다. 편 가르기에 몰두하고 증오를 신념화 한다. 또 하나 극단주의는 절대적 “자기 의”에 빠지고 나아가서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우를 범한다. 그것은 십계명이 경고하는 정치적 우상화 내지는 우상체제로의 일탈을 몰고 온다. 기독교 신앙의 공헌은 종교적 우상화만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우상화, 특정 이념이나 체제의 우상화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십계명 정신에 따라 모든 피조물의 “평등한 자유 민주체제”를 강조하며 그 모범적 실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셋째로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공동의 바탕은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주는 일이다. 통합은 좌우갈등의 적당한 미봉책도 아니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무색무취한 “중립”도 아니다. 쌍방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현장에서의 중립이란 결과적으로는 패자를 버리고 승자에 기생하는 편파적 태도일 뿐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무관심으로 거부하거나 비겁함으로 도피하는 것은 “무작위 범죄”에 속하는 잘못이다. 중심에 서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고 정당한 자의 편을 들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예언자적 사명”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에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꾀를 부려 갈등에 개입도 안하고 무감각한 구경꾼이 취하는 “중간”도 아니다. 중간은 빈 공간이 아니라 갈등의 쌍방이 너 죽고 나죽는 공멸이 아니라 너 살고 나 사는 상생의 광장으로 이끌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생의 광장을 제공하고 화해로 이끄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제사장적 사명”이다. 편의상 진보적인 예언자적 사명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제사장적 사명은 갈등을 정당하게 해소하거나 또는 상생의 통합으로 이끌어 주는 상호보완적 사명이다. 건강한 몸의 양 팔 내지 양 다리의 상보적 역할과 같다. 이 상보적 사명과 역할의 핵심은 몸이라는 중심이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중심은 국민이 채택하고 의지하는 “헌법”이다. 헌법은 국민의 삶의 기본가치를 담은 중심이요 규범이다. 이 사실을 갈등의 현장에서 분명히 진실과 상생의 잣대로 밝혀주어야 한다. 헌법의 규범을 두고 해석과 적용에 갈등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빛에서” 이를 밝혀줌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은 한 손에 헌법규범을 다른 한 손에 성서를 들고 사회 갈등 해소와 통합노력을 경주하되, 헌법을 성서의 눈으로 해석하고 갈 길을 제시함이 옳을 것이다. 사회통합은 사회의 심포니 내지 오케스트라 연주이다 앞에서 언급한 “중심잡기”는 중신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조화로운 공동체적 결속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몸을 비유로 들어 말하자면 몸통은 하나이나 양 팔과 다리를 비롯한 몸에 연결되어 사는 모든 지체는 다양하다. 몸통을 건강하게 구성하는 살아있는 지체들은 부피나 크기도 다르다. 심장과 콩팥과 신장이 각기 다양하고 다르듯이 서로 성격도 다르다. 기능도 다양하다. 어느 하나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픈 연대성에 산다. 어느 하나가 병에서 나으면 옴 몸이 기뻐하는 연대성으로 산다. 지체들이 다양하나 몸을 중심으로 서로 엮기며 통합된 모습으로 살기에 이를 “유기체적 통합”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는 다양한 은사가 만드는 아름다운 조화, 성서의 말씀대로 하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롬 8:28)과 같다. 건강한 유기체들의 조화와 화음을 음악의 용어를 빌어 필자는 몸의 “심포니”라 이름 하고 싶다. 심포니는 다양한 소리가 협력하여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화성 음악이다. 모든 소리가 각자 지닌 특유의 소리를 자유롭게 발성하되 화음을 이루는 발성이어야 한다. 발성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는 그래서 공동체적 자유이고, 자유로운 발성은 공공선을 이루는 화음의 발성이다. 이를 관현악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오케스트라”라고 할 것이다. 다양한 악기가 자기만의 독특한 음을 자유롭게 낼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려면 모든 악기의 음은 화음을 이루게 내야한다. 화음이 아니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소음은 다름 아닌 바로 갈등이다. 사회의 현상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여 보면 소음으로 뒤범벅이 된 오케스트라는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이고,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는 다양성 속에 하나로 통합된 사회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아닌 아름다운 화음을 추구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리는 불안하고 시끄러운 갈등을 딛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사회적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사회적 심포니 내지 사회적 오케스트라의 원형은 그리스도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라고 자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몸통”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통에 붙어 사는 “지체”인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공동체 만큼 다양한 인간집단이 어울려 사는 사회공동체는 없다. 출신성분도, 고향출신도, 학력이나 지위나 역할도, 성별 세대별 차이도, 타고난 은사도, 실로 다양한 구성원이 “그리스도 신앙”을 공동의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신앙의 화음 공동체이다. 이런 화음을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또는 반대로 “일치를 이루는 다양성”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의 심포니요 신앙의 오케스트라이다. 문제는 오늘날 일반 사회가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교회가 사회의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아름다운 심포니가 아닌 시끄러운 소음의 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시 화음을 배우고 실행해야 한다. 모든 지체가 다시 붙어 있어야 할 몸통으로 돌아와야 한다. 몸통에 붙어 있는 한 각 지체의 기능을 아름다운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신앙의 심포니를 연주하면 된다. 사회통합의 틀도 바로 이러한 일치와 다양성의 조화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 사회통합은 개인의 자유가 배제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아니다. 다양성을 배제한 전제적 획일주의 사회도 아니다. 몸통인 헌법에 보장된 “자유, 인권, 정의, 복지, 평화”라는 기본 가치가 우리 사회 심포니의 대본이다. 그것은 다행이도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샬롬”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먼저 갈등하는 당사자나 집단이 이런 헌법적 가치를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명실 공히 기본으로 삼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예언자적” 비판적 통찰과 비판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다양성은 기본 내지 기본을 공유한 전제하에서의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집단이 정당한 바탕위에서 나름의 심포니나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고 판단되면, 연주의 질과 뉴앙스와 표출방식 등에 다양성이 있는 것은 한국사회를 보다 넓고 높고 깊은 민주적 선진사회의 모습으로 보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화해와 상생을 이루는 “제사장적” 사명인 것이다. 통합의 방식은 사랑이고 최고치는 원수 사랑이다 사회통합의 기초로 삼는 기본가치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유하고 실천에 옮기는 힘과 동기는 “사랑”이라 믿는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여 갈등의 극복과 통합에 나서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1 4:8,16). 그리스도를 보내심도 그의 사랑 때문이고(요 3:16),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의 계명(마 22:34-40)이다. 더 심도 있는 사랑의 계명은 “원수사랑”의 계명(마 5:43-48)이다. 어쨌든 사랑의 부재가 갈등이요 사랑의 회복이 통합이다. 개인도 사회도 그렇다. 앞서서 헌법의 기본가치 또는 샬롬의 기본가치를 설명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 사랑의 척도가 이웃사랑에 있고 이웃 사랑의 목표가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산이고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들어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웃 사랑이 없는 자유는노예사회의 경우처럼 주인의 독재적 자유와 부림 받는 노예의 무자비한 속박을 낳는다. 정치적 권력의 체제에서 사랑 없는 자유는 우리 인류의 역사상 권력자의 극우적 파쇼주의 지배를 낳곤 했다. 자유는 항상 상대방 앞에서의 자유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인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항상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의”의 함정에 빠져서 적대관계의 괴물을 낳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극좌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함께 적대적 냉전의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 내었다. 사실 우리시대의 사회적 갈등 현상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갈등이 상호 표용할 수 있는 생산적 내지 상호 교정의 상태가 아니라 적대화되고 진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념갈등이 온갖 사회갈등의 블랙홀처럼 역기능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의 길로 들어서려면 하나의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사랑”의 계명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먹는 소위 남남 갈등 및 남북 갈등의 정상이 마로 이것이다. 속칭 “예수 믿고 천당!”의 구호대로 한다면 “원수 사랑해야 천당!!”이라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웃사랑을 자기사랑처럼 실천하기도 힘든데, 원수 사랑을 형식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 사랑처럼 베풀 수 있나? 여기서 두 가지 처방을 살펴보겠다. 하나는 적대관계에 있는 당사자나 당사국 사이에서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는 “지성적 원수사랑”(intelligente Feindesliebe)이 필요하다는 서구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의 제안이 있다. 요지는 대충 이러하다. 원수관계의 핵심은 증오인데 원수관계의 현실을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수를 우리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듯이 원수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면서, 두려움과 증오의 현실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면밀히 알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간의 두려움과 증오가 증폭되면 전쟁의 위협으로 기승하기 때문에, 우리 편이 먼저 두려움과 증오의 강도를 줄이면서 전쟁가능성을 막고 오히려 평화를 향한 선제적 조치 곧 단계적인 원수 사랑의 발걸음을 떼자는 전략적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남남 갈등의 현장에서 적용됨으로 폭력과 파멸을 단계적으로나마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남북 갈등에 있어서 이 방식을 적용함으로 전쟁발발로 인한 참혹한 비극을 차단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평화적 선제조치일 것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갈등의 당사자 가운데서 앞서 말한 삶의 기본가치에 내공이 상대적으로 크게 쌓인 측이 우선권을 쥐고 실행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과는 가치관 경쟁에서 비교도 못할 정도로 성공한 남한이 선제적 평화공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남북 간에 평화공존이 이루어 질 경우,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공존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서 기본가치관을 중심으로 남북 간에 선의의 경쟁과 생산적인 갈등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여기서 승리하는 쪽으로 통일의 길이 수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원수 사랑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러하다. 상대방을 원수로 설정하고 사는 한 자기 자신의 뇌리와 가슴 속에 항상 원수가 꼿꼿이 서있으며, 자기 자신의 판단과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 자신이 종이고, 원수가 원치 않는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자유가 아닌 속박의 틀이다. 여기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사랑과 자기의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원수관계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인이 되고, 나아가 원수에게 지지 말고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로마서의 해법을 인용해본다(롬 12:17-21). 요지는 이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적대관계라는 갈등은 처참하다. 파멸의 블랙홀이다. 적대관계에 편승하면 적대관계의 노예가 된다. 이념적 적대관계는 이념의 노예를 만든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적대관계는 증오의 노예를 만든다. 신과의 관계가 적대관계이면 스스로 우상이 되어 파멸로 간다. 교리적으로 적대관계를 만들면 이단사설로 파멸의 길로 간다. 자기 스스로와의 적대관계는 자살을 낳는다. 이웃과 적대관계를 맺고 살면 살인과 사형으로 치달린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나, 갈등이 악종이 아니라 선종일 경우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사회에서 상보적 생산성으로 승화시켜 오히려 사회의 폭과 깊이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갈등이 심각하여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최소한 그 갈등이 불치의 적대관계의 틀로 심화되지 않도록 갈등의 “평화적 관리”가 바람직하며, 이 일을 위해 특히 기독교 사회가 심혈을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20-01-13
  •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였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병들었거나 죽은 양심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았기에 세계가 인정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신동식 목사 양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주신 선물입니다. 양심은 법조문이 없을 때 법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법이 무질서하게 되면 사회가 무질서해집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최후의 보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의 정신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소망이 없습니다.그런데 법이 없을 때는 어떻게 사회가 유지 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양심이 법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법전이 없어도 양심이 법전이 되어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합니다. 하지만 양심이 부패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심이 병들거나 죽어 버리면 사회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양심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이 범죄 함으로 양심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양심이 병들자 나타나는 것은 브레이크가 없는 탐욕이 생겨났습니다. 이제 탐욕이 양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피를 나눈 자신의 형제도 죽이는 잔인한 일을 합니다. 형제도 죽일 수 있다면 친척과 이웃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양심이 굳어진 세상은 참으로 처참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밀하게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양심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양심이 바르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손에 있는 성경은 양심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직 고장 난 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나마 양심의 흔적이 있기에 세상은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양심이 회복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압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양심은 온전히 작동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양심이 부패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인 된 몸을 입고 있기에 늘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잠시 망각하기도 합니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은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에 따라 양심이 작동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여기서 성경대로 죽으셨음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성경대로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언약 가운데 말씀하셨던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삶의 새로운 빛을 주신 죽음입니다. 그 열매는 성경대로 부활하심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복음에 사로잡혀서 작동합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양심은 반드시 그에 걸 맞는 행동을 합니다.복음에 합당한 행동은 거듭난 양심의 증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은 복음에 사로잡힌 성도에게만 나타납니다. 복음에 이끌림을 받는 신앙은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만의 신앙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의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머리에서 시작하여 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과 발로 나타나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사람이 보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알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합당하게 신앙 생활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진동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행동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실천으로 나타내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웁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무너지는 것도 다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나부터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할 때 교회가 세워지고, 가정이 행복하고, 나라가 건강해집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복음에 합당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시작하고 끝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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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연재
    2020-01-13
  • (이창엽 선교사칼럼)하나님 사랑의 언약, 무지개
                                              하나님 사랑의 언약, 무지개  하나님 사랑의 영원한 언약의 상징이 무지개이다. 성소수자들 깃발이 무지개 깃발이라 기독교에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동성애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다. 로마서 1:27, 레위기 20:13에서 죄로 보고 있다.                                         사랑의 언약 무지개 vs 한옥의 무지개, 홍예보    건물 앞뒤 기둥을 연결하는 수평 구조부재로 무지개 모양 혹은 아치 모양으로 장식된 보를 말한다. 보 아랫부분은 처져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해 배걷이 했으며, 소로 폭으로 단면을 줄였다. 그래서 보의 단면형상은 둥글고 아래는 소로 폭으로 좁혀진 보이고, 마치 항아리와 유사해서 ‘항아리보’라고도 한다.   무지개의 어원은 물(水)로 만들어진 문이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옛말은 ‘므지개’ 인데 물의 옛말인 ‘믈’에서 ‘ㄹ’이 탈락하고 문을 뜻하는 지게(호戶: 한쪽으로 여는 문을 말하고 주로 방으로 통하는 작은 문에 썼다.)와 결합한 말이다.(국립국어원, 2003) 동양에선 상서로운 현상으로 서양에서는 행운의 상징이다.   논산 종학당, 홍예보   중국에서는 무지개를 짐승의 일종으로 생각해 수컷을 홍(虹), 암컷을 예(蜺)라고 불렀고, 다리 밑이 반원형으로 된 다리를 홍예교(虹蜺橋)라 하고, 무지개다리는 이상향으로 가는 매개체로 흔히 언급되는데, 땅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무지개를 아치 형상의 다리로 연상시킨 것이다.(나무위키 2020)   순천 송광사, 홍예교        ☞무지개 - 사랑의 언약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으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3)(대한성서공회,2019)  
    • 오피니언
    • 이창엽선교사
    2020-01-10
  • "본다고 하나 맹인 된 자들" (요9:1-12)
      대림다문화센터 대표, 대림중국교포교회 이선규 목사   사람은 누구나 두 눈이 있다고 해서 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눈 뜬 소경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글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에게 책을 갖다주면 하면 종이와 활자는 보지만 의미는 모르니 보나 마나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악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악보를 주며 노래를 부르라 해도 악보는 보아도 노래는 나올 수 없으니 눈뜬 소경이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먼 하늘의 성좌와 무궁한 공간의 천체를 보지 못하고 아무리 가까워도 공간과 물체 속에 꽉 차 있는 미생물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시간적으로도 먼 미래를 보지 못 할 뿐 아니라 다음 순간에 될 일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다.먼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사람도 가까이 마주 대하고 대화를 하고 사귀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기에 사람의 가슴속 머릿속은 들어가 볼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이다.   쉐익스피어의 햄릿에 보면 햄릿의 비밀을 캐러 온 두 사람에게 그는 피리를 내밀며 불라고 한다. 그러나 그 중 길레스탄은 “저는 불 줄을 모릅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좋은 소리를 못 냅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햄릿은 격한 어조로 “그럼 너는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너는 내게 여러 가지 소리를 불게 하라고 하는데 마치 내 악보를 아는 체 하고 내 마음의 비밀을 다 캐내려고 최저음으로 최고음까지 불게 하려고 하지 않느냐. 보라. 이 작은 피리 속에 온갖 아름다운 음색 묘한 소리가 꽉 차 있다. 이것조차 불지 못하는 주제에 이 작자야, 나를 피리보다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알아보았느냐? 멋대로 사람을 악기 취급하는 것은 네 자유지만, 나를 노하게는 할 수 있어도 내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오늘날 글 못 보는 소경은 많지 않고 악보를 못 보는 소경은 많지 않을지 몰라도 사람 못 보는 소경은 많을 것이다. 하물며 정신의 세계 영계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은 얼마나 많을까? 주님은 스스로 잘났다고 하고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바리새인을 눈뜬 소경이라고 책망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눈먼 맹인은 인간들이고 바로 우리들 아닐까? 사람을 보면서 사람을 모르고 세상을 보면서 세상을 모르고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면서도 진리를 모르고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제자들은 눈먼 맹인의 눈을 뜨게는 못 하면서 그 이유를 캐묻고 아는 체 하고 이론을 따지기만 했던 것처럼 오늘의 종교, 철학, 윤리, 예술, 과학 정치, 경제가 인생과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암중모색하면서 마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할 것처럼 우쭐대고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행렬은 역사에서도 현대에 또한 미래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원인이 자기 아비의 죄인가? 자기의 죄 인가를 따지고 묻기에 바쁘다. 그것이 제자들의 질문이었다. 이 소경이 나면서 눈먼 것이 자기 아비의 죄 때문입니까? 혹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입니까?   스탠리 존스 박사는 인간은 고통과 불행의 책임을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첫째 유전, 둘째 환경, 셋째 운명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당하는 환경을 부모와 기성세대에게 돌리는 것이 첫째 경우이고 사회와 환경의 탓이라면서 이웃과 사회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둘째이고 셋째는 알지 못하는 운명의 탓이라면서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과 이브의 후예로 그럴듯한 핑계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는 소경들의 공론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의 문제 불행과 불행의 문제를 조상 탓으로 돌리지 말라. 남의 탓으로 하지 말라 현재의 자기 탓이라고 한탄하지도 말라. 내일도 일반이라고 절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즉, 창조의 능력 사랑의 섭리, 구속의 은총, 재창조의 역사가 그에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바로 나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바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인생은 눈먼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니 그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눈을 뜨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예배하게 되었다. 예수를 보게 되므로 빛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을 보게 되고 세상을 보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알게 되었다. 나면서 소경인 사람은 자기 눈을 띄워 보게 해 준 예수를 보게 됨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무식한 소년도 보면서 믿게 된 예수를 꼭 같이 만나고 보면서 왜 유식하고 경건한 바리새인은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되었나? 그들은 겉만 보고 속은 못 보고 소리만 듣고 의미는 모르고 형태만 보고 가치는 모르는 자들이다.   그릇된 선입견으로 하나님도 세상도 사람도 그릇 보고 있었다. 병 고친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안식일에 일했으니 예수가 곧 죄인이라는 것이다. 안식일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을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잘 아니까 믿지만 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모르니까 못 믿겠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을 잘못 알아 참 진리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가 누구였는지 내 눈을 뜨게 한 분이 사실인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한데 왜 믿지 못하느냐는 소경의 증거를 듣고 네가 죄인으로 우리를 가르칠 작정이냐고 책망을 한다. 자기가 의인이라는 선입 주관 때문에 타인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 바른 증거를 듣는 귀가 가리워 지고 말았다. 안식일과 율법과 자기가 우상이 되어 눈을 가리워 져서 예수님도 사람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본다는 말은 의미를 알고 가치를 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구라파 상인들은 아프리카 소녀들이 공기돌을 갖고 노는 아이를 조그만 거울 하나씩에 막 바꾸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르고 자기의 생의 의의를 모르면 사람이 동물도 되고 기계도 되고 물질도 되고 악마도 된다.마구 값없이 인생을 처분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상속권을 팔았던 에서처럼 자기를 팔아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 버리고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그 반대로 아무 가치 없는 것을 우상화하고 그 앞에 굴복하고 그것을 믿게도 된다. 부귀와 권세와 향락으로 썩어질 피조물의 종노릇을 하면서 묘지까지 걸어가게 된다.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고 부분을 전부라고 우기며 다투는 희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부각 된 인간은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고 했다.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인격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왕 같은 제사장, 택한 백성, 거룩한 나라가 된 인간의 존엄을 보게 된다.   자기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기 생의 의미와 사명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된다. 주께서 보시는 눈으로 이웃과 사회를 보게 될 때 사랑의 빛 아래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된다.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 세리와 창기, 탕자와 죄수, 강도와 원수까지 구속의 대상 사랑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빛 속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내가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데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다웠다고 사도 요한은 땅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환란과 핍박이 있는데 밧모섬 이란 무인도에서 새 세계의 비전을 보게 된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맹인처럼 살던 신도들은 그리스도가 전 우주를 통치하는 영원무궁한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원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속의 사랑을 입은 자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중 “네가 본다 하나 실상은 눈이 멀었다” 하시고 스스로 다 아는 체 하는 바리새인에게 “차라리 보지 못하는 자인 줄 알았더라면 죄가 없을 뻔하였다”고 하셨다. 본다고 하니 아직 죄인이라고 하신다. 소경 된 사람은 구원하고 의인인 척하는 자들은 책망하신다. 나면서 눈먼 소경은 보게 되나 스스로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은 소경이 이라고 하신다.   지금도 구원받는 자는 보고 심판받는 자는 보지 못한다. 보는 자는 구원받은 자요. 보지 못하는 자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자들이다. 우리 눈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음은 헬렌 켈러의 기도이다. 그가 쓴 글에 “내가 만일 사흘만이라도 눈을 떠서 보게 된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하루는 하늘에 해와 달과 그 뭇 별들을 보고, 땅에 피는 온갖 화초와 새소리 개울 물소리를 듣고만 알고 느낌으로만 알고 만져만 보던 그 아름다운 것들을 볼 것이요, 둘째 날은 뉴욕 박물관을 찾아 인류 역사상 인류가 남겨 놓은 모든 유물들과 그 유명한 모든 미술품들을 구경하겠고, 셋째 날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손으로 악수만 해오던 모든 친구들의 얼굴을 친히 볼 것이다.” 사흘만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이 눈을 아니 일 년 아니 평생을 뜨고 볼 수 있는 분들은 아무 감각이 없을지 모르나, 나면서 소경 된 사람으로는 그 눈으로 보는 것이 실로 일각을 천금보다 더 귀하게 보았을 것이다.   우리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주님과 세상과 이웃을 그리고 나 자신을 보게 하옵소서. 시간의 세계를 살아가지만, 영원을 보며 소원했던 헬렌 켈러의 간절한 기도가 떠오른다. 주여 보게 하옵소서. 새해의 나의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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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0
  • 경단녀서 CEO로…’맘스라디오’ 김태은 대표
    ▲김태은 대표가 유튜브를 촬영하고 있다.   최근 육아를 콘텐츠로 한 스타트업을 설립해 경력단절을 극복한 맘스라디오 김태은 대표가 주목 받고 있다. 유튜버와 책 출간으로 엄마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된 그녀를 만나봤다.경단녀 엄마들과 함께 제작하는 콘텐츠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기혼여성 중 상당수가 경력단절을 경험한다. 경력단절의 가장 큰 원인은 단연 ‘육아’ 문제다. 출산 이후 돌아갈 곳이 없는 엄마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맘스라디오’ 김태은 대표도 14년 경력의 베테랑 방송작가였지만 출산 후 경력단절을 경험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육아를 콘텐츠로 한 유튜브를 시작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방 한 켠에서 ‘왜 엄마를 위한 라디오는 없을까?’ 라는 짧은 질문으로 유튜브를 시작한 그녀는 모든 이들의 삶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업에서 실패한 것도, 하나님을 만난 것도, 특별히 내가 어떤 요리를 잘 하는 것도, 아이를 잘 키우는 것도, 글을 잘 쓰는 것도 다 콘텐츠거든요. 내 삶에 힌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두를 이유가 있게, 목적이 있게 지으셨기 때문에 그것이 공유될 때, 콘텐츠로 만들었을 때 누군가의 삶에는 도움이 되더라고요.”   ▲유튜브 '맘스라디오' 채널 캡처   맘스라디오는 구독자 4만 명을 훌쩍 넘기면서 많은 엄마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육아하면서 생긴 불면증, 부부 간 부딪히는 육아법 등 엄마라면 모두 공감할 내용을 나누며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변호사를 게스트로 초대해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엄마들이 궁금해하는 법률적 고민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다양한 콘텐츠에 김태은 대표 뿐 아니라 전문가 엄마들이 마이크를 잡았다. 엄마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함께 방송을 꾸려 나가는 것이다.  공연 만드는 엄마들의 수다 ‘에미제라블’, 책 읽는 엄마 김보영 아나운서의 ‘우아한 Booking’, 후회 없는 육아를 위한 ‘박재연의 공감톡’ 등의 프로그램이 있다.  김 대표는 최근 유튜브를 하면서 나눈 다양한 경험들을 다룬 책, ‘엄마는 유튜브로 연봉 번다’도 출간했다. 자신처럼 유튜브를 하고 싶어하는 경력단절 엄마들을 위한 실제적인 팁을 기록했다.  맘스라디오는 시작한 지 2년 만에 매출 2억원을 달성했다. 김 대표는 수익금으로 미혼모와 아동학대 당한 아이들을 후원하는 등 선행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같이 성장하고 자기만의 콘텐츠를 가지고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소망을 밝혔다.  “하나님이 주신 엄마라는 사명은 한 생명을 날 믿고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에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잖아요. 엄마들이 그 사명을 기쁘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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